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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May 21. 2019

나는 누구의 가족인가

우리가 언제부터 시집을 갔다고

"자기도 결혼하면 우리 집안사람 되는 거잖아. 제발 이젠 말도 안 되는 고집 좀 그만 부려!"


생각보다 자주 접하게 되는 이 고리타분한 문장을 최근에 본 건 예비 시가의 제사 문화 문제로 결혼이 파혼 위기라는 어느 글에서였다.

연애할 때 듣기로는 분명 제사가 없다고 했는데, 남자친구의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가보니 마침 제삿날이었다나 뭐라나. 알고 보니 제사가 산 넘어 산처럼 많은 집안이었단다. 어른들을 설득하겠다고 여자를 안심시켰던 남자가 종국에는 저런 말을 남겼다고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복장이 터지다 못해 혈압이 상승하는 사연을 읽으며 나는 시종일관 중얼거렸다. 

"깨! 그런 결혼은 하는 거 아니야!”


남의 집안 제사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결혼하면 당연히 남편 집안의 사람이 된다는 그 당연한듯한 관념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거다. 

사실 그 "그 집안사람" 혹은 "이 집안사람"소리는 나도 들었다. 

웨딩드레스 입고 신부대기실에 그림처럼 앉아있던 날, 여든을 넘기신 친정 큰어머니가 내 귀에 속삭이신 마지막 인사가 “가서 잘 살아라. 너는 이제 그 집안사람이다."였다. 

환갑을 맞이하신 예비 시아버지도 내게 이런 말씀을 남기셨지. "너는 이제 내 집안사람이니 앞으로 너는 나를 존경하도록 하여라."

그때마다 나는 생각했다. 

‘왜죠?’


내 의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혼인신고를 하며 확인할 수 있었다. 내 호적은 무사했으니까. 사실 호적이 무사하다는 표현도 사실 옳지 않다. 호적이라는 것은 이제 과거로만 남아있으니까. 호주제는 2008년 1월 1일 『가족관계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호적과 가족관계 등록법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기 센 여자들이 날뛰어 민족의 근간이 흔들리고 나라가 망한다며 목소리를 높이시던 할아버지들로 가득 찬 티브이 화면이 그것이다. 물론 플래카드를 앞에 걸고 큰소리 외치던 한 무리의 아줌마들도 기억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정말로 그 아줌마들 때문에 나라가 망하는 줄 알았다. 내가 그 덕을 보게 될 줄은 그땐 정말 몰랐다. 


결혼식은 올렸으나 혼인신고를 할 생각을 하니 괜스레 기분이 우울하고 머리가 아팠다. 이제 시집 식구 누가 호적을 떼면 시아버지 혹은 시 큰아버지를 기준으로 줄줄이 나오는 개인의 신상정보 속에 나도 있겠구나 싶어서말이다. 친정 큰 오빠네 새언니처럼 말이지. 


호적은 호주 중심의  家 단위로 움직인다. 

할아버지 중심으로 사람들이 댕글댕글.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큰아빠 기준으로 댕글댕글.

아빠 중심으로 댕글댕글. 

여자가 결혼하면 (큰) 아빠 아래에서 남편이 댕글댕글 있는 곳으로 옮겨져 댕글댕글.

댕글댕글.

내가 무슨 댕글댕글 옮겨 다니는 방울인가.

그래서 여자가 시집을 갔다는 표현은 호적 파 갔다는 말과 같은 뜻이었다던가.


2005년 헌법재판소에서 호주제에 대해 헌법 불합치 판결이 내려졌다. 

부성 주의 원칙을 수정하여 자녀에게 엄마의 성을 줄 수 있도록 결정권이 생겼으며, 부모의 이혼과 재혼 등을 겪은 자녀의 앞날을 위하여 부모가 법원의 허가를 통해 자녀의 성과 본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하는 성(姓) 변경 제도가 시행되었고, 친양자제도를 시행하여 만 15세 미만의 누군가를 자식으로 들일 때 친양자 재판을 통해 친자와 동일한 인정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외에도 동성동본 금혼 제도가 폐지되었고 근친혼 금지 제로 변환했다. 여성의 6개월 재혼금지기간 규정도 삭제되었다.

판결문을 잠시 빌려보자. 

《사회의 분화에 따라 가족의 형태도 모와 자녀로 구성되는 가족, 재혼부부와 그들의 전환 소생 자녀로 구성되는 가족 등으로 매우 다변화되었으며, 여성의 경제력 향상, 이혼율 증가 등으로 여성이 가구주로서 가장의 역할을 맡는 비율이 점증하고 있다. 호주제가 설사 부계 혈통주의에 입각한 전래의 가족제도와 일정한 연관성을 지닌다고 가정하더라도, 이와 같이 그 존립의 기반이 붕괴되어 더 이상 변화된 사회환경 및 가족관계와 조화되기 어렵고 오히려 현실적 가족공동체를 질곡 하기도 하는 호주제를 존치할 이유를 찾아보기 어렵다.》 (민법 제781조 제1항 본문 후단 부분 위헌제청 등. 2001헌가 9.10.11.12.13.14.15, 2004헌가 5(병합) 전원재판부)

더 이상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전통과 법이 사회상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을 입증한 역사의 한 장면인 것을.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들보다 내게 가장 크게 와닿은 것은 단연 가족관계등록부와 혼인관계 증명서의 등장이었다. 

2005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결정 및 민법 개정으로 인해 호주제가 폐지된 지 2년 후, 기존의 家 중심의 호주제를 대체할 새로운 제도가 등장했다. 바로 가족관계등록부 이다. 바뀐 제도를 통해 개인의 존엄과 양성평등의 헌법 이념을 구체화하고 사회 변화에 따른 새로운 제도들이 차질 없이 시행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관련된 평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가족관계 등록부에는 나를 기준으로 부모와 배우자 그리고 자녀만 기재된다. 국민 개인별로 본인 중심의 3대의 가족관계만 표시하는 것이다. 조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다. 뼈대 있는 집안의 후손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절대 잊으면 안 되었던 본적은 등록기준지로 바뀌었고, 이마저도 이제는 내가 바꿀 수 있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내 손에 들어온 두 장의 종이를 본 나는 환호성을 질렀다.

혼인관계 증명서가 내가 결혼을 했음을 증명하고, 가족관계등록부가 내 가족은 우리 아빠 엄마와 새신랑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무슨 짐짝처럼 내가 뿌리째 싹 들려 이리저리 잘 알지도 못하는 집안으로 옮겨지지 않아도 된다는 게 너무나 좋았다. 

나는 내 집안에서 나고 자란 내 부모의 딸이지 않나. 이게 어떻게 변한다는 말인가.

그러니, 결혼을 했으니 "너는 그 집안사람이다."라는 말은 적어도 이 시대에서는 틀린 말이다. 

내 성이 죽을 때까지 유지되는 것처럼 나는 그저 이 남자와 결혼한 나 일 뿐이다. 


호주제의 폐지를 말하던 그날의 판결문은 또 이렇게 말한다. 

헌법은 국가 사회의 최고 규범이므로 가족제도가 비록 역사적 사회적 산물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헌법의 우위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가족법이 헌법 이념의 실현에 장애를 초래하고, 헌법규범과 현실과의 괴리를 고착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면 그러한 가족법은 수정되어야 한다.

우리 헌법은 제정 당시부터 특별히 혼인의 남녀동권을 헌법적 혼인 질서의 기초로 선언함으로써 우리 사회 전래의 가부장적인 봉건적 혼인 질서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는 헌법적 결단을 표현하였으며, 현행 헌법에 이르러 양성평등과 개인의 존엄은 혼인과 가족제도에 관한 최고의 가치규범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중략)

호주제는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에 기초한 차별로서, 호주승계 순위, 혼인 시 신분관계 형성, 자녀의 신분관계 형성에 있어서 정당한 이유 없이 남녀를 차별하는 제도이고, 이로 인해 많은 가족들이 현실적 가족생활과 가족의 복리에 맞는 법률적 가족관계를 형성하지 못하여 여러모로 불편과 고통을 겪고 있다. (중략)

오늘날 가족관계는 한 사람의 가장(호주)과 그에 복속하는 가속으로 분리되는 권위주의적인 관계가 아니라, 가족원 모두가 인격을 가진 개인으로서 성별을 떠나 평등하게 존중되는 민주적인 관계로 변화하고 있고, 사회의 분화에 따라 가족의 형태도 모와 자녀로 구성되는 가족, 재혼부부와 그들의 전혼소생자녀로 구성되는 가족 등으로 매우 다변화되었으며, 여성의 경제력 향상, 이혼율 증가 등으로 여성이 가구주로서 가장의 역할을 맡는 비율이 점증하고 있다. 호주제가 설사 부계 혈통주의에 입각한 전래의 가족제도와 일정한 연관성을 지닌다고 가정하더라도, 이와 같이 그 존립의 기반이 붕괴되어 더 이상 변화된 사회환경 및 가족관계와 조화되기 어렵고 오히려 현실적 가족공동체를 질곡 하기도 하는 호주제를 존치할 이유를 찾아보기 어렵다. (중략)

호주제를 전제하지 않는 새로운 호적 제도로 호적법을 개정할 때까지 심판 대상 조항들을 잠정적으로 계속 적용케 하기 위하여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한다.》



그날의 판결문을 읽으며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나는 누구이며, 내 가족은 누구인가.

전통이란 무엇이며,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나는 지금 어디쯤에 서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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