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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Mar 08. 2019

여성 상위시대, 시월드와 처월드 사이에서

우리가 언제부터 시집을 갔다고

장롱 대신 드레스룸을 들인 지금의 사람들은 대부분 핵가족으로 산다.

내 집 마련은 정말 일생의 꿈이라 철마다 이사를 다니고 그때마다 새로운 집을 꾸미고 적응하기를 반복한다. 

내가 한참 자라던 1995년에 남자는 28.4세 여자는 25.3세에 첫 결혼을 했다고 한다. 오늘날의 남녀 평균 초혼 연령이 30대 초반인 것을 생각하면 새로운 가정을 꾸려 독립하는 일이 점점 늦어지고 있다. 결혼의 추세도 바뀌고 있다. 오찬호 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개인은 여전히 각자도생이 난무하는 정글 속에서 생존을 위한 발버둥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맞다. 부모 세대에서는 당연했던 것들이 우리에게는 당연하지 못하다. 일단 낳으면 알아서 크고, 열심히 직장 생활하다 보면 집 한 채 마련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거든.

둘이 온전히 아이 하나 둘을 키우기 힘들고 내 집 하나 마련하기도 벅차서 둘이 나가 벌어도 숨이 턱턱 막힌다. 

그나마 신혼 때는 상황이 낫다. 아이가 태어나면 상황이 달라진다. 분명 시작은 남부럽지 않게 키운 양쪽 집 아들딸의 만남이었는데, 아이가 태어나고 나면 남부럽지 않게 키운 어느 집 딸은 세상에서 사라진다. 아이가 태어났으니까, 아이가 아프니까, 아이가 유치원에 갔으니까,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서 엄마의 손길이 필요하니까. 고비마다 아이 엄마에게 기댈 언덕이 없다면 그녀의 이름 석 자는 사라진다. 

아이 낳은 여자가 내 이름을 지키며 내 새끼도 잘 키우자면, 또 더 많은 수입으로 빨리 자리라도 잡으려 치면, 나 대신 아이를 돌봐주고 힘들 때 힘 보태줄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래서 아이가 생기면 친정이든 시댁이든 어느 한 곳 가까이로 그렇게들 이사를 간다. 지극히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다. 



너만 부모 있냐? 처월드

이 시대 며느리에게는 시월드가 있고, 사위에게는 처월드가 있다. 

아이를 처가에서 봐주셔서 혹은 집이 가까워서 또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많이 주셔서 알게 모르게 사위의 생활 속으로 훅! 들어온 처가와의 쉽지 않은 동거를 빗댄 신조어이다. 시집살이로 며느리들만 힘든 게 아니다 이거지.

왜 장모님은 내 이름을 막 부르시며 은연중에 막 대하시느냐고.

왜 처남과 나를 차별하시냐고.

왜 내 행동들을 지적하시냐고.

요약하자면, 불편하고 불쾌하다고. 

위와 같은 사위들의 불편함 뒤에는 딸 가진 부모가 있다.   

남부럽지 않게 금이야 옥이야 키운 내 딸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물심양면 팔 걷고 나서시는 여자의 부모님 말이다. 남자의 부모님처럼 경제 발전기를 살아내며 자리를 잡은 세대이고, 전통의 시집살이를 견딘 세대이며, 내 딸은 나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고 바라며 알파걸들을 키워낸 분들이다. 

사실 양가 부모님들은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아들을 가진 부모냐 딸을 가진 부모냐에 따라 갑자기 입장이 달라진다는 것뿐이다. 

결혼할 즈음 스타강사 김미경 씨의 강연에서 이런 말을 들었다. 

"시어머니가 한 10억 줬다 그러면 여러분은 평생 그 집에서 커튼을 빨아야 하는 거여!"

맞다. 결혼 적령기의 남자가 돈을 모아봐야 얼마나 모았다고 자력으로 집을 사서 결혼을 하나. 남자가 부모 도움으로 해오는 집은 남자 부모의 기둥뿌리이다. 그러니 이에 대한 보상으로 무엇이라도 받은 며느리는 매일 커튼을 빨아야 하는데, 사실 우리에게 익숙한 시집살이이다. 

똑같은 이치다. 

처가에서 아이를 키워주고 사는 것에 도움을 주신다면 그것은 장인 장모가 살만하고 해 주실 만해서 해주시는 게 아니고 그저 감사할 일도 아니다. 그 또한 처 부모의 기둥뿌리이고 노후니까. 


하지만 우리는 참으로 불편하다. 

받으나 안 받으나 불편하다. 

받으나 안 받으나 시월드의 갑질에 불편하고, 받으나 안 받으나 처월드의 무례함에 불쾌하다. 



여성 상위시대를 사는 "어디 감히 며느리”가

예전 같았으면 말 한마디 제대로 못 꺼냈을 딸 가진 죄인들과 그의 딸들이 발언권을 갖게 되면서 심심치 않게 듣게 된 말이 있다. 

"이젠 여성 상위시대라니까"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키우면 된다면서 아들 하나를 낳기 위해 딸만 줄줄이 낳는 친구네 집들이 생각보다 많았던 내 어린 시절에도 우리는 생각했다. 우리가 어른이 되었을 때는 다를 거라고. 

우리는 엄마와는 다른 세대이고, 우리는 잘난 딸 들이니까. 

학창 시절, 알파걸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공부도 운동도 성격도 최고인 어느 집 잘난 딸을 일컫는 말이었다. 비록 알파걸은 못되었지만, 웬만한 아이들 못지않게 공부했던 그 시절, 나는 내가 커서 살게 될 세상은 성별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껏 살 수 있는 그런 곳일 줄 알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높다.

딸을 낳으면 비행기를 타고 아들을 낳으면 수레를 끈다며 딸이 더 선호 받는 세상이다. 

분명 과거와는 다른 세상이고 나는 딸을 낳았다. 그러나 남편의 집안에서의 나는, 그저 "여성 상위시대를 사는 어디 감히 며느리" 일뿐이다. 

그 많던 알파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바뀌었다지만 바뀐 것은 없다. 

여성 상위시대라며 여자들이 살기 좋아졌다는 이들에게 늘 묻고 싶었다.

누구의 기준에서 여성의 지위가 당신들보다 위에 있다 보느냐고.

여성의 지위가 그렇게 높아져서 결혼한 여자는 모든 일에 시댁이 우선에 있어야 하고,

여성의 지위가 그렇게 높아져서 명절마다 허리 끊어지게 음식을 만들어 당신들의 술상을 봐드려야 하며,

여성의 지위가 그렇게 높아져서 데이트 폭력과 살해를 당하고,

여성의 지위가 그렇게 높아져서 계획된 범행으로 강간 물약에 취해 폭행을 당하고도 여자가 처신을 잘못했다는 말을 들어야 하는가.

그러니 누구의 기준에서 여성 상위시대라 하는지 묻고 싶다. 

당신의 기준에서, 달라진 세상에서 훨씬 커진 발언권을 갖고 살아가는 그녀들이 불편한 것은 아닌지.

"어디 감히 며느리가" "며느리니까 당연히"라며 도리를 입에 달고 사는 이들에게도 묻고 싶다.

생물학적 우위에 깃 대어 영원한 갑질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닌지.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말을 빌려본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에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그 말 뒤에 덧붙인다.

“하지만 바뀌어야 한다.”


참고 및 인용

결혼과 육아의 사회학 (오찬호. 휴머니스트)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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