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언제부터 시집을 갔다고
터키 여행 영상을 보면 키가 큰 남자가 흰 옷과 까맣고 긴 모자를 쓰고 긴 옷자락을 펄럭이며 빙글빙글 도는 세마 춤 장면이 나온다. 그 세마 춤이라는 것을 우리의 탈춤 정도로 여겼던 나는, 터키문화원에서 주최한 어느 행사에서 이에 관한 설명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하나님께 가는 길은 여러 가지가 있고, 그중에 노래하고 춤추는 길을 선택했다.”라고 했던가.
세마 춤의 세마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묵상한다는 뜻의 아랍어 사마에 기원을 둔다고 했다.
그분이라…
터키는 이슬람 국가이다. 이슬람은 이단이라고 배워 의심치 않았던 나와 내 친구는, 세마 춤을 시작으로 터키의 종교와 우리의 오해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시는 이슬람학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망부석처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야, 우리는 학교랑 교회에서 뭘 배운 거냐?”
“사기당한 거지.”
이후의 갈등과 역사는 어떠했는지 차치하고라도, 이삭의 하나님과 이스마엘의 하나님은 같은 분이니까.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앉아 있었다.
우리의 가부장제라는 것은 한 곳에 정착해 농경생활을 하며 씨족 중심으로 살다 보니 자연스럽게 형성된 매우 뿌리 깊은 우리의 사회문화라고 배웠다. 뭔가 심정상 아닌 것 같지만 무엇이 아닌지 모르겠던 시절, 우연히 한국사 강의를 듣다 깨달았다.
참 여러모로 사기를 당하며 살았다는 것을.
사실 가부장제가 언제부터 이 땅에 들어왔는지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지만, 내 귀에는 고려 말 성리학이 유입되면서부터라는 주장이 가장 타당하다. 게다가 부계 위주의 족보와 장자 우대, 아들들을 위한 제사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가부장제는 조선 중반 이후에 나타나 후기에야 정착된 것이니, 사실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
왜란과 호란을 겪으며 양반과 상놈의 도가 흔들려서, 그때에야 등장한 것이니까.
삼국시대부터 이미 이 땅의 딸들은 글을 배웠고 무술도 배웠고 호주가 될 수 있었으며, 제사와 유산 분배에서도 소외되지 않았다.
시집가면 그 집안 귀신?
아들딸들이 서로 돌아가며 자기 조상 제사를 모셨는데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시나. 여자가 관직에 나가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열등하지도 않은 사회 문화였다.
그랬던 이 문화가 왜란과 호란 이후 폐쇄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돈 많은 상놈이 족보를 사들고 양반 행세를 하니까 진짜 양반들은 똘똘 뭉쳐 자신들의 울타리를 지켜야 했을 것이다. 장자 기준으로 모여 더욱 진짜 인척을 해야 했을 것이고 가짜도 이를 본받아 더욱 진짜인척을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 스스로를 지키자니 사회문화는 폐쇄적, 좋은 말로 보수적으로 변하게 되어 여자들은 남존여비(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다) 하고 여필종부(아내는 반드시 남편에 순종하며 따라야 함) 해야 하며 삼종지도(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결혼해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라 살아야 한다)를 따라야 하고 칠거지악(남편의 일방적인 의사로 이혼을 요구할 수 있는 여자의 일곱 가지 악행 사유)을 피해야 하는 인고의 세월을 살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의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시작은 조선 중기 이후부터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제강점기는 좀 달랐을까? 가부장제는 일종의 식민지 통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총독부에 의해 호주권이 강화되었고 창씨개명을 하며 여성들은 남편의 성을 따르게 됐다. 현모양처라는 개념도 이 시기 일제에 의해 들어왔다. 모두 천황제 군국주의를 강화하기 위함이었다.
천년을 이어긴 중국 미인의 절대조건인 전족을 아는가.
성인 여성의 발 크기가 9cm 이하인 것을 아름답다 하던 시절이 있었다. 딸아이가 네다섯 살이 되면 작고 가늘고 뾰족한 발을 만들기 위해 닭을 잡아 뜨거운 뱃속으로 아이의 발을 집어넣어 발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다음 엄지발가락만 놔두고 네 발가락을 완전히 꺾어 발바닥에 밀착시켰다. 서있기도 힘들었겠지만 예쁜 발 모양을 만들기 위해 자주 걸어야만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전족을 하지 않은 여성은 천민이라서.
이런 이유로 상류층을 동경하는 서민들에게 무섭게 확산되었는데, 아무리 가난해도 발 큰 여자를 집안에 들이는 것을 가문의 수치가 여기는 풍조 때문에 가난하게 태어나 가난한 집에 시집을 간 가난한 서민 여성은 전족 때문에 제대로 걸을 수 없기에 무릎으로 기어 다니며 농사일과 집안일을 해내야 했다.
우리는 해방 후에 군사정권이 성립되며 한국 고유의 미풍양속을 계승한다는 정책 하에 온 국민이 제사와 차례를 지내기 시작했다. 우리 민족에게는 명절이면 모두가 조상을 기리는 아름다운 미풍양속이 있었다며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정형화된 형태의 제사상을 준비한다. 하지만 원래 제사라는 건 족보라던가 성씨같이 지켜야 할 게 있었던 양반들만 지내던 것이었다. 조선 중후기에 들어 족보를 돈으로 사고파는 행위와 위조가 성행하기 전까지, 성씨와 족보를 가진이는 전체의 7%에 불과했다. 이 말은 이 시대에 양반 운운하고 조상님을 챙기며 며느리를 갈아 넣어 제사상을 올리는 집안의 태반은 성도 족보도 제대로 없었을 상놈의 노비 집안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전족이라는 것은 사실 송나라 무희들의 작고 뾰족한 신발을 보고 상류층 여인들이 따라 했던 일종의 유행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게 뭐라고.
우리가 언제부터 모두가 제사를 지냈다고.
아무리 넉넉히 따져본다 해도, 가부장 전통의 역사는 427년을 넘지 않는다. 5천 넘는 한민족 역사에서 427년.
“퍽도 유구한 전통이네.”
... 에서 이야기가 끝난다면 우리는 중요한 포인트를 놓치게 된다.
사회와 인간살이의 변화 말이다.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와 조선, 일제강점기와 개화기 그리고 지금 현재는 모두 다르다. 사회의 구조도 문화도 살아가는 양상도 모두 다르다. 과거를 현재에 끼워 맞출 수 없는 것처럼, 현재 보고 과거로 돌아가라는 것도 어불성설이지 않은가.
몇 년의 역사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혼인 풍습부터 정치문화까지 모두 당시의 사회상과 정치적 필요에 의해 계속 변해왔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면 안 된다. 그러니, 전통이라는 말에 억눌릴 필요도, 딸을 가져서 죄인일 필요도 없고, 며느리라 억울할 필요도 없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은 언제 적 이야기 인가.
문화는 사회에 따라 변화한다.
변화를 거부하는 기존의 문화는 자신들이 이미 확보한 태생적 우위를 놓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균열은 이미 시작됐다.
참고 및 인용
EBS 지식채널 332화. 전족이 아름다운 이유. (2007년 9월 17일 방영)
+, 더하는 글
<도리>
도리는 상황에 맞게 형편 껏 하는 것.
앞으로 도리는 닭도리탕에나 쓰도록.
명절 특수를 맞이하여 며느리 도리 이슈가 핫해서인지
오늘도 뜨거운 명언 하나를 발견했다.
도리.
결혼하면서 상대의 집안과 부모님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시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서로가 서로에게 적당한 예의와 도리를 지키기만 한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매일 밤 맘 카페와 단톡 방이 그렇게 폭발하진 않을 텐데.
도리를 지키지 않으니까.
서로가 서로에게
도리도리.
2016년 2월 24일. 그 시절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