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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우리가 언제부터 시집을 갔다고

by 상지

가끔 내가 조선 말기에서 개화기 사이를 살고 있나 싶을 때가 있다.

같이 사는 남자를 볼 때마다, 결혼 준비하던 순간부터 철 되면 돌아오는 명절마다 나는 양쪽의 시공간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낀다.


내가 결혼하던 시절에는 예비 신부들 사이에서 예비 시부모님께 압화예단편지 라는 것을 드리는 게 유행이었다.

“딸처럼 잘 할게요. 저 예쁘게 봐주세요.” 이런 의미를 담아 정성을 더욱 보여드리는 행위 중 하나였다.

내게도 딸 같은 며느리를 꿈꿨던 시절이 있었다.

아들만 있는 집 장남과 결혼하면서 나는 정말로 딸 같은 며느리가 되겠다 다짐했었다. 딸이 친정엄마 아빠 챙기듯 딸 없는 시부모님을 챙겨드리고 싶었다. 이 꿈이 깨지는 데에 일 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딸 같은 며느리는 며느리가 딸과 동등한 위치일 때나 가능한 일이라는 걸 새 신부가 알 리가 없지.


“가서 잘 살아라. 너는 이제 그 집안사람이다.”

웨딩드레스 입고 신부대기실에 앉아있던 날, 친정 큰어머니가 부디 행복하게 잘 살라며 내 귀에 속삭여주신 말씀이었다. 아들만 셋 낳아 키운 큰어머니의 눈빛에서 나는 진심임을 읽을 수 있었다.

큰어머니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은 혼인신고를 하고 나서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호적법이 폐지되었으니까.

호적법이 있던 시절에는 결혼한 여자의 호적이 남자 쪽으로 따라갔다지만, 지금은 가족관계상 남편이 생길 뿐 다른 변화는 없으니까. 이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 말이 되는 변화이다. 내가 나고 자란 내 뿌리가 있는데, 남편의 집안을 언제 봤다고, 그저 여자라는 이유로 뿌리를 이리저리 옮긴단 말인지.


“자기는 가서 일해야지.”

남편이 출장을 갔건 아내가 유산을 했건 암 수술을 받았건 명절이면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듣는 한 마디들이 있다. 이른바 "며느리 도리"

그리고 생각보다 많은 여자들이 시댁에 가서 노동을 하고 돌아와 그렇게들 많이 싸운다고 한다.

따지고 들면 남편의 집안이고 남편의 조상인데, 누구의 행복과 만족을 위해 그녀들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노동을 해야 했던 걸까.

조상께 올려드릴 제사상을 다른 성씨를 가진 며느리들의 노동력으로 차리는 부정타기 딱 좋은 관습은 대체 언제부터 시작되어서 전통이라 하는 것일까.


“엄마 나 이제 도련님이야.”

결혼을 앞두고 예비 시댁에서 식사를 하던 중이었다.

남편의 동생, 그러니까 시동생이 예비 시어머니께 웃으며 한 말이 내 입장에선 좀 충격이었다.

자기가 도련님이라고. 결혼하면 서방님이라고.

‘그럼 나는 종년이니?’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시댁은 시가. 아버님 어머님은 아버지 어머니.

시동생은 시동생.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아이 삼촌.


6년 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같은 생각을 한다.

남자들은 연애랑 결혼은 똑 부러지는 21세기 여성과 해놓고 왜 결혼 후에는 조선시대 양갓집 규수를 원하는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남부럽지 않게 배우고 자란 이 시대의 딸들은 어쩌다 개화기 여염집 아낙네처럼 살기를 강요당하며 왜 스스로를 희생시키는지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21세기에 개화기를 사는 사람들 같으니.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남편에게 말한다.

“미안한데, 나는 백치가 아니거든!”



+, 더하는 글


<남의 편의 이상형>


어떤 표정을 보여줘도

어떤 말을 들어도 해맑게 웃어주는 뇌가 청순한 여자.

아파도 아프다 하지 않고

아기를 낳고도 철근을 고사리 나물처럼 씹어 먹을 수 있는

건강한 여자.

이게 너란 남의 편의 이상형인듯.


난 죽었다 깨어나도

일단 뇌부터 청순하지를 못하겠는데 미안해서 어쩌지?


2016년 3월 12일. 그 시절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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