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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Jun 12. 2019

이 남자에게 나는 "안사람"입니다.

우리가 언제부터 시집을 갔다고

"야! 너는 결혼식은 세상 똑 부러지게 해 놓고선 왜 그러고 사냐?"

그랬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내 뜻대로 진행한 결혼식 이었다. 

차분하고 경건하게. 

조명은 요란하지 않고 빛이 흐르듯 했으며, 음향은 시끄럽지 않고 맑았다.

예식의 시작과 동시에 출입문을 닫았고, 드레스는 머메이드라인 신상으로 어깨가 드러나지 않는 디자인을 입었다. 결혼식에서 내가 챙기지 못한 것이 있다면 딱 두 가지, 집에 놓고 온 식권과 무남독녀 외동딸의 폐백에 참여라도 하고 싶어 하셨던 친정엄마의 바람을 읽지 못한 것뿐이었다. 


"아들 가진 유세하시는 겁니까?"

식장도 청첩장도 한복도 예물도 다 준비한 상황에서 우리는 파혼을 고려했다. 

발단은 한겨울 독 바람이 불던 선릉 앞 한복 집에서였다. 

그날은 한복 가봉을 보는 날이었다. 그렇게 얼굴을 본 김에 양가 어른들은 이바지와 답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셨다. 참고로 이 집안에서 여자란 "남편의 결정에 따르는 이"이기에 이날의 모든 논의와 결정도 엄마와 예비 시아버지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집안에 식구가 많지 않으니 이바지와 답바지는 생략하자는 게 예비 시부의 뜻이었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사건은 서로 조심히 가시라며 안사돈들끼리 사담을 나누시던 중에 벌어졌다.

예비 시어머니 당신 친정에는 식구들이 있으니 이바지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나.

그것도 반말로. 

예비 시아버지는 당신이 나서 '당신의 안사람은 말을 짧게 하지 않는 사람이나, 만약 그랬다면 미안하다.' 사과를 하시면 모든 문제가 없던 일처럼 해결될 줄 아셨다. 하지만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들은 아니셨다. 아버지와 똑같은 얼굴로 우리 엄마는 절대 그럴 분이 아니라며 해명하기에 바빴던 그에게 반지를 돌려주고 오던 날, 양가 어른들끼리 하신 통화에서 우리 부모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금 아들 가진 유세하시는 겁니까? 우리 딸이 못마땅하시거든 이쯤에서 그만하시지요."

결국 사과는 예비 시어버지가 하셨다. 남편의 어머니에게는 발언권이 없으니까. 


천상 여장부인 엄마는 "딸 가진 죄인"운운하시며 결혼 준비 내내 우울해하셨다. 남부럽지 않게 키운 딸이 그리 번듯하지도 않은 집안을 만났다는 것도 속상하고, 그마저도 무엇 하나 매끄러운 것이 없어서 슬펐다고 했다. 내 생각에는 그냥 그동안 엄마가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신 것 같지만, 어쨌든 엄마는 딸을 가져 우울하고 기죽은 죄인이었다. 

예비 시부가 극구 반대를 하시어 예약해둔 반상기도 취소했다. 이미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으니 감사의 꽃 편지 같은 것은 내게 해당 없는 일이었으나, 예비 시어머니 앞으로 명품 백 하나는 넣어 드렸다. 

아빠는 밍크코트도 보내야 하는 것 아니냐 하셨는데, 나도 못 받는 밍크코트를 왜 보내야 하나 싶었다.

딸 가진 죄인이니까, 하필 큰아들에게 시집가는 거니까, 두루두루 흠 잡히지 않고 예쁨 받기를 바라는 뭐 그런 부모의 마음이었겠지.

예단을 들이던 날, 예비 시어머니는 가방을 끌어안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사줄 거야?"

그 초롱초롱한 눈빛이 잊히지 않았다. 

그 눈빛과 결혼식 날의 어이없음, 그리고 황당했던 함 바구니가 잊히지 않아서 신행 선물로 현지 특산품인 병따개를 사다 드렸다.  


"예. 제 안사람도 같이 갈 겁니다."

결혼을 하고 나니 이 남자는 나를 안사람이라고 지칭했다. 와이프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고 안사람이라니.

갑자기 과거 어디쯤으로 회귀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점점 나를 과거 어디로 끌고 들어가는듯한 기분 나쁜 느낌이 엄습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집안 남자들은 개화기를 살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결정은 시아버지가 하셨고, 나머지 가족들은 군말 없이 따라야 했다.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란 남자는 나 역시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뭐든 남편과 시동생이 상의하고 결정했다. 나에게는 통보. 그저 통보였다. 내가 똑똑해서 좋다던 남자가, 내게 그랬다.  


"느-네 집안은"  

"전라도 것들은-"

당신의 고향이 경상도 영주이고, 족보 있는 집안인 것이 일생의 자랑인 시아버지는 은연중에 사돈댁을 가벼이 여기셨다. 내 본가가 경상도 경주라고 말씀드렸지만, 그분 머릿속에는 내 외가가 전라도 익산인 것만 남아있었나보다.

그래서 우리는 수도 없이 싸웠다. 

너는 왜 나를 백치 취급하냐 싸우고, 시아버지는 왜 우리 집안을 무시하시느냐 또 싸웠다.

남들은 꿀 떨어진다던 신혼에 우리는, 싸웠다. 


"부모에게 효도해야 하느니라. 네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지 않느냐."

잘 배우고 다복하게 자란 자랑스러운 예비 며느리는 어느새 예민하고 막돼먹은 큰며느리가 되어있었다.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던데, 순종적이지 못하다며 미움받는 처지가 되었으니 부모님의 속은 오죽하셨을까.

그랬다. 나는 순종적이지 않았다. 

결혼 당시 시아버지는 건강이 그리 좋지 못하셨다. 시아버지는 당신의 상황을 가족에 알리시며 경과와 이후의 절차까지 모두 당신 혼자만 들으시고, 스스로 결정하시고 통보를 하셨다. 병원에도 일절 찾아가지 말라고도 하셨는데, 가족들 모두 그 뜻에 따랐다. 그 말씀을 거역한 게 나였다. 

시아버지의 담당 교수를 만나 인사를 하고, 경과를 체크하고, 간호사실에 간식을 돌렸다. 아, 의사에게 담배 끊었다 거짓말하신 사실을 일러바친 것도 나다. 그리고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꾸중을 들어야 했다. 

내 생각에는 이게 며느리의 도리였고, 그분께는 불순종이었다. 

아마도 시아버지께서는 잘 배운 며느리가 돈도 잘 벌어오고 자손도 잘 낳으며, 당신 내외 앞에서는 "네네" 온순하기를 원하셨던 듯하다. 이게 그분들이 생각하신 딸 같은 며느리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정작 그 며느리의 부모는 그렇게 살라고 낳아 애지중지 키우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시아버지 당신이 원하시던 첫 손이 태어나고, 정말 오랜만에 한 통화에서 시아버지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누르시며 부모에 대한 효도를 강조하셨다. 

당신에게 효를 다 하지 않은 며느리에 대한 질책.

아, 자고로 어미란 죽더라도 절대 소젖은 먹이지 않는다고도 하셨다. 아이를 낳고 이튿날 혈압이 급격히 떨어져 아이를 신생아실에서 분유 보충을 시켰는데, 그걸 보신 거다.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 그 분은 끝내 나에게 미안했다 그 한마디 하지 않으셨다. 그저 나는 어느 날 뜬금없이 하신 "고맙다."그 한 마디에 다 들어있다고 혼자 생각할 뿐이었다. 


"그래서 자네, 내 딸과 이혼할 텐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봐도, 참고 참고 또 참아도, 데이트 요청을 해봐도, 좋게 말씀을 드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웃으며 말하는, 말 잘 듣는 여자 인형이 필요하셨으면서 큰아들 장가에 왜 그리 집착을 하셨는지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나는 사람인데.

결혼 6개월 차였던가, 결국 시아버지와 말다툼을 했다.

새댁이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시아버지의 틀린 말씀을 지적하려니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정말 이 악물고 버텼다. 

여기서 밀리면 나는 평생 백치로 살아야 할 것 같아서 정말 이를 악 물었다.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해온 역사가 가문의 자랑인 여자와, 어른이 틀린 것을 맞다 하시면 맞다고 해드려야 하는 줄 아는 남자의 결혼생활은 그렇게 파국에 이르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해결을 위해 시아버지는 아들을 사돈댁으로 보내셨다. 

버릇없이 시아버지에게 대든 딸을 대신해 어른들이 사과를 하시고, 그렇게 며느리를 훈계하시겠다는 의중이었다. 

하지만 그날의 대화는 그분의 바람과는 다르게 흘렀다. 


"그래서 자네, 내 딸과 이혼할 텐가?"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사과 못하네. 자식을 위해 굽히는 것쯤이야 할 수 있으나, 우리가 그렇게 하면 내 딸이 자네와 살 수 있겠는가?" 


부모님은 버티셨다. 해결은 부부인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공을 넘기셨지만, 어쨌든 버티셨다. 그리고 나도 버텼다. 남편이 울며 자기를 봐서라도 그냥 "잘못했습니다." 그 한마디만 해드리면 안 되냐며 사정을 했지만 나는 버텼다. 거기서 숙이면 앞으로 더 하실 것을 나는 아니까. 

우리는 냉전 끝에 그럭저럭 결혼생활을 유지했다. 그렇게 현재와 미래, 과거의 구습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줄타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결혼 6년 차다. 

이제는 제법 우리 나름의 규칙과 거리두기를 터득했다. 조금씩 살아가는 시간대를 좁혀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지만 순간순간 다가오는 조선시대로의 타임워프와 관념적 굴레의 순간들은 아직도 나를 당황케 하고 분노케한다. 

그럴 때마다 미혼인 절친이 해주는 말이 있다.

"너는 결혼식은 세상 똑 부러지게 해놓고선 왜 그렇게 사냐?"



모르겠다. 

그 결혼식이 잘 한 것이었는지, 이 결혼이라는 것도 잘 한 것인지, 잘 살고 있는 건지.

결혼을 몰랐던 나는, 결혼식이 결혼인 줄 알았던 것 같다. 가장 우리 세대답고 나답게 결혼식이라는 이벤트를 치르면 이후의 결혼생활도 당연히 그러할 줄 알았나 보다. 

가끔은 차라리 내가 둥글둥글한 백치과의 사람이었으면 삶이 편안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백치로 살기는 이번 생엔 글렀으니까 이것만큼 쓸데없는 생각도 없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태어나지도, 그렇게 자라지도 않았으니까. 



어쨌든. 

이제는 이 남자가 나를  내자( 內子)가 아닌 안사람이라 해줘서 고맙다.

이렇게 우리는 같이 가고 있다. 

시집도 장가도 아닌 결혼을. 함께 현재를 살아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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