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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Jun 13. 2019

가스라이팅

우리가 언제부터 시집을 갔다고

1880년 안개가 자욱한 런던. 

벨라가 물었다.

"집안이 왜 이렇게 어둡지?"

가스등을 쓰던 시절에는 어느 곳에선가 가스등을 켜면 다른 층은 불빛이 약해지곤 했다. 

벨라의 남편은 일부러 집안의 가스등을 어둡게 만들어 놓았으면서, 오히려 아내를 탓했다.

"그러지 않아. 당신이 잘못 본 거야."

위층에서 아내 몰래 무언가를 해야 했던 남편은, 자신 때문에 약해진 가스등과 소음을 모두 아내의 예민함 탓으로 돌리며 무시했다. 처음에는 반신반의하던 벨라도 점점 스스로를 의심하게 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 연극 가스 라이트(Gaslight. 영국 1938)의 일부이다. 

이 연극은 이후 영화로도 세상에 알려졌으며, 심리학 용어 '가스라이팅'의 유래가 되었다. 

가스라이팅(Gas lighting)은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상대를 정신적으로 황폐화 시키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하여 결국 상대를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최근 들어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폭력 등에 종종 인용되는 심리학 용어이기도 하다.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나는 느낀바를 남편과 공유하고 싶었다. 아련한 청소년기와 20대의 기억을 상기하며, 딸 가진 부모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이야기 나눠보고 싶었다. 하지만 남편은 소설의 내용들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주작"이라며 대화를 거부했다. 


"너희만 힘든 거 아니야."

"어디 감히 며느리가."

"세상에 잘나고 똑똑해서 남자들보다 잘 나가는 여자가 얼마나 많은데."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도 어떻게 며느리가."

"그거 주작이야."

"그래도 네가 며느리니까."


개화기로의 본격 타임워프는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시작됐다. 2부 행사도 마치고 폐백도 끝내고, 신혼여행 떠나기 전에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이제 갓 성혼 서약을 마친 나에게 시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네가 아무리 나 보다 많이 배웠고 많이 알아도 너는 이제 내 며느리다. 내가 네 시아버지고, 내가 너보다 오래 살았으니 너는 앞으로 나를 존경하도록 하여라."

기가 막혔다. 살다 살다 존경의 이유로 나이를 제시하는 못난 양반이 내 시아버지라니.

세상에나 맙소사.


처음에는 뭐랄까, 큰아들의 결혼을 위해 일종의 비즈니스를 하신 것 같았다.

불쾌했다. 우리 부모님은 하나의 가족이 생긴다 여기시고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셨는데, 저분은 당신의 목적을 위해 거래 행위를 하신 건가 싶어서 참으로 불쾌했다. 그래도 참았다. 나는 며느리니까.

한 번 참고, 두 번 눈 감고, 세 번 허허실실 웃어드리니 나는 참고 눈 감고 웃고 앉아있는 게 당연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이건 아닌데.'   

왜, 내가, 어쩌다가-를 수도 없이 되뇌었던 것 같다. 

그럴수록 분명해진 것은,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살라고 나를 키우시고 예의를 갖춰 사돈 맺은 게 아니라는 것과 내가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남편과 그 가족이 일부러 의도했다고는 여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와 내 주변은 이미 사회적 통념과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아내 혹은 며느리를 가스라이팅 하고 있지 않던가. 나도 그렇게 시집살이 당하던 어느 집 딸이고 아내이고 며느리일 뿐인 것이다. 


요즘 우리네 삶에는 참으로 많고도 다양한 주작들이 넘쳐난다. 주작이라는 표현은 인터넷 신조어로, 어떤 일을 임의로 조작하거나 은폐하는 등의 행위를 말한다. 특히 (결혼한) 여자들이 모여 떠드는 온라인 어디라면 으레 꼬리표처럼 "주작"이라는 말이 따른다. 의미 없는 유희를 위해 만들어낸 이야기일 뿐이니 심각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설명도 붙는다. 

분명 대중의 관심받기를 좋아하는 관종들이 지어낸 소설인지 주작인지가 존재할 것이다. 페이스북만 봐도 맞춤법 다 틀린 막장 카톡들이 그렇게들 많이 돌아다니지 않나.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82년생 김지영>도 따지고 보면 그 세대의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겪었던 혹은 겪음직한 일들을 엮은 소설이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그런 환경에서 나고 자랐고, 그런 여건에서 살고 있는 건 딱히 부인할 수가 없기에 그렇게 많이 공감하고 아파하고 분노하는 것이 아니던가. 

설령 주작이라 하더라도, 그 많은 여성들이 공감하고 분노하며 감정을 토로하고 해소하는 현상을 단순히 관심을 즐기는 소모적이고 변태적인 행위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충 봐도 만들어낸 자극적인 소재임이 보이는 몰상식한 내용에 사람들이 달려들어 소모적인 욕배틀을 하는 심리의 기저에는, 단순한 분노와 조롱의 희열도 있겠지만 그 몰상식한 상황을 이미 직간접적으로 겪은 불쾌함이 자리한다. 맘 카페와 네이트판, 주작이 넘친다는 페미니즘 사이트의 그 많은 글들에 여성들이 공감하고 분노하며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이유가, 실제로 나와 내 주변이 당했고 당하고 있는 일이며 닥칠 수 있는 일이라는 심리에 기인한다는 점을 외면하면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럴 리가 없고, 그럴 분이 아니야."

내 편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신랑을 절대 남편이라 부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가운데서 수없이 터지는 샌드백 신세였던 고맙고도 애잔한 신랑은 내가 예민해서 곡해하는 거라며 종종 남편이 되어버리곤 했다. 시아버지로 대표되는 시집 식구들과의 갈등으로 우울이 정점을 찍던 신혼, '이건 너무나 이상해!' 소리 없이 속으로 질러댄 외침이 그 시절 내가 나를 지킬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럴 리가 없어.” “그럴 분이 아니야.”라고 할 때마다 나는 홀로 사막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이던 시절, 이런 유머가 있었다. 

미국 남자들은 자신의 딸이 힐러리 클린턴 같기를 원하지만 와이프가 힐러리 같아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고. 

개화기에서 현대 어딘가에 있을 내 남편은 딸바보이다. 종종 그의 생각이 궁금할 때가 있다. 훗날 그의 딸이 내가 당한 것 같은 가스라이팅을 겪게 된다면, 그는 딸에게 무어라 할까. 


"어디 감히 며느리가-."가 온당한 말이라면, "어디 감히 남의 집 귀한 딸에게-."도 가능해야 하지 않을까.

대체 우리가 언제부터 시집을 갔다고.




이전 11화 이 남자에게 나는 "안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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