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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Aug 29. 2019

딸 같은 며느리

우리가 언제부터 시집을 갔다고

‘아! 딸 같은 며느리.’

대학원 진학을 준비하느라 토플학원에 다닐 때였다. 초등학생 딸 둘을 키우는 아줌마 언니가 우리와 같은 스터디 조에 들어왔다. 영어 교육을 전공으로 엄마인 자신이 유학을 가고, 그 김에 딸들도 함께 미국에서 공부시키겠다는 목표가 있던 언니였다. 스터디원이 전부 여자여서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참 많은걸 그 언니에게 물었고 참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많은 이야기 중 유독 내 귀에 꽂힌 게 하나 있었는데, 바로 ‘딸 같은 며느리’였다. 언니는 자기 것 주걱을 살 때 친정엄마 드릴 것과 시어머니 댁에 드릴 것을 같이 구입하는 그런 딸 같은 며느리라 사랑을 받는다고 했다.


“야! 딸 같은 며느리가 어디 있냐?”

티브이 어느 예능에 나온 박지윤 전 아나운서의 이야기가 화제였다. 그녀는 딸 없는 집 남자와 결혼을 하며 자신이 딸 노릇을 해야겠다 마음을 먹었다고 했다. 시어머니와 친해지기 위해 시아버지가 안 계실 때는 속옷바람으로 돌아다니고,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볼 때면 시어머니 무릎 위에 천연덕스럽게 발을 올려놓고, 시어머니가 식사 후에 그대로 놔두라 하셔서 정말 숟가락만 탁 내려놓고 거실로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며느리에게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발을 주물러 주시고, 밥 먹은걸 치우지 않아도 예뻐해 주셨다는 “그 집안”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마다 그 끝에는 그녀가 돈을 잘 버는 며느리라서 그럴 수 있는 거라는 사람들의 의견이 늘 따라붙곤 했다.


“잘 벌잖아.”

여자가 돈을 잘 벌면 제아무리 시부모여도 아무 말 못 해야 하는 거고, 여자네 집안이 남자네보다 부자면 아무리 며느리가 막장이어도 가난한 시부모는 아무 말 못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이라며 나름의 지론을 펼치는 어떤 이의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딸 같은 며느리가 되고 그 며느리를 딸처럼 여기시겠다는 듣기 좋은 다짐의 전제조건은 금전에 있는 것인가. 돈을 잘 벌면 딸처럼 행동해도 되고 돈을 못 벌면 몸종처럼 행동해야 하는 것이며, 시부모님이 가난하면 막 대해도 되는 것 일까.

아무리 결혼한 여자 인생이라는 것이 시집 내 밑바닥 계층부터 성취해 올라가는 지위라지만,  그 척도가 돈에 있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너와 결혼을 한 나는 너에게 기생해 사는 존재가 아니며, 나와 결혼한 너는 가정부를 고용한 것이 아닐 텐데 말이다. 서로 귀한 아들 딸이 만났는데 그냥 적정선의 예의를 지키며 살면 안되는 걸까. 내 새끼와 혼인하여 자식 낳고 손 맞잡고 사는 남의집 귀한 자식이라 여기는게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근데, 딸은 돈을 못 벌어도 딸 이다.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그냥 딸이다.

딸은 그냥 딸이라 사랑을 받는다. 밥상은 차려줘야 먹는 거고, 종종 철없는 헛소리도 하는데 그래도 딸이라 핀잔이나 조금 들으면 끝이다. 보통의 딸이란 그렇다. 사랑받음의 조건이라는게 딸 아들에게 필요한 것이던가.

그런데 왜 며느리인 나는 남편 너의 여동생 같은 행동을 하면 안 되는 걸까.

딸같은 며느리라며.



아들만 둘 뿐인 집의 큰 아들과 결혼을 했다.

20대 그 시절, 토플학원에서 만난 그 언니의 조언들을 새기며 나도 그렇게 사랑받는 며느리가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 부모님을 챙기듯 시부모님의 일을 챙겼다. 그러고도 무언가 눈치가 보였고, 가끔 욕을 먹었다. 뭔가 더 나서서 챙기고 치워야 할 것 같았는데, 그렇게 눈치를 보고 있는 내 곁에는 어서 가서 거들지 않고 뭐하냐며 더 눈치를 주던 새신랑과 여자들끼리 알아서 하라며 담배 피우러 나가던 남편과 시동생과 시아버지만 있을 뿐이었다. 뭔가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더욱 의지를 들여 집에서 부모님께 하듯 행동을 했다. 딸 같이 여기신다 하셨으니까. 부모님 챙기듯 챙기고, 남편 없이도 아기 데리고 시집 행사에 참석하고, 부모님 대하듯 행동했더니, 나는 막돼먹은 며느리에 싹수없는 형수님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딸 같은 며느리 아들 같은 사위라는 말을 들으면 헛웃음부터 난다.

그건 배우자의 부모를 잘 만난 팔자 좋은 어떤 이들에게 국한되는 것이라는 걸 그때 나는 왜 몰랐을까. 그들은 뭐 전생에 나라라도 구한 걸까.

며느리란 내 아들과 결혼한 남의 집 딸이고, 사위란 내 딸과 결혼한 남의 집 아들일 뿐이며, 그 딸과 그 아들은 함께 살기로 결심한 운명 공동체일 뿐이라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내가 돈을 더 잘 버는 며느리였다면 좀 달랐을까.


퍽이나.



+, 더하는 글


<남편 없이 시집 행사 참여하기>


남편의 사촌 형이 늦게 늦게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그 아이의 돌잔치가 있던 날, 하필 남편은 일정이 생겨 갈 수가 없어서 혼자 두 돌 된 딸아이를 차에 태워 두 시간 거리를 운전해 돌잔치에 갔다.   

아이와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어쩌다 보니 내 앞에 시 고모부님이 자리를 잡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은근슬쩍 자리를 피한 게 아니었을까 싶지만,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옮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기에 그냥 그렇게 있었다.

잔치가 시작되고 모두가 즐거운 분위기에 술 한 잔 걸치신 고모부님이 나에게 말씀을 건네셨다.

“니 저 글자가 뭔지 아나? 내가 아이의 장수와 부귀한 앞날을 기원하며 직접 써서 선물한 글자니라.”

붓글씨가 취미이고 종종 개인전도 하시는 어르신이 쓰신 글씨이니 어련하시겠냐만은, 순간 나는 기분이 매우 나빴다.

“고모부님. 저희 딸 돌 때는 저런 거 안 해주셨잖아요. 지금 아들딸 차별하시는 건가요?”

그다음은 별 것 없었다.

대답도 없으셨고, 그냥 소주만 연거푸 드셨을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 그 일을 이야기했다.

내 말을 다 들은 남편은 이렇게 답을 했다.

“에이 설마. 차별해서 그러셨으려고.”


우리 부부의 결혼은 그야말로 양가의 축제였다.

친정도 시집도 오랫동안 결혼 소식이 없고 어린애 울음소리도 끊겼던 터여서, 연이 끊겼던 친척들까지 모두 와 축하를 했던 그런 자리였다.

그렇게 개혼 아닌 개혼을 하고, 그다음 해에 신랑의 노총각 사촌 형도 결혼을 했다.

그다음 해 우리가 딸을 낳았다. 이 집안에서는 한 30여 년 만에 터진 아기 울음소리였다. 그리고 또 그다음 해 사촌 형이 아들을 낳았다.

얼굴이 좀 뻔뻔한 나는 종종 신랑에게 강조를 하곤 했다.

나한테 고마워해. 내가 복덩이인 거야.

내가 들어오고 다른 사람들이 결혼도 하고, 내가 아이를 낳고 다른 집들도 아이를 낳잖아.

하지만 내가 먼저 강조를 해서인지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나 말고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다시 그 날의 기억으로 돌아가면, 내 기억은 이 순간에서 멈추곤 한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와 등장한 나를 보자 사촌 형이 반갑게 나와 인사를 해주었다.

“어휴. 00 이도 없이 제수씨 혼자 어떻게 오셨어요?”

그 반가운 인사에 나는 물색없이 이렇게 대답을 했더랬다.

“운전해서 왔지요. 제가 그 사람보다 더 운전을 잘해요. 블라블라.”


아, 다시 생각해도 이건 이불 킥 감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이 집안에서 운전이란 남자들만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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