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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Jun 26. 2019

그 후로도 행복했을까

우리가 언제부터 시집을 갔다고

꼬마 공주가 있었다. 

동화 속의 이야기가 진짜 일어나는 일이라고. 용감하고 잘생기고 인기 있는 왕자님이 나타날 거라고. 나도 그런 왕자님을 만나 다른 공주들처럼 ‘그 후로 행복하게’ 살게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름답고 교양 있고 현숙하고 기품 있는 숙녀로 자라야 하기에, 어린 공주는 늘 왕실 규범을 잘 따라야 했다. 막춤 같은 것은 절대 안 될 일이었다. 춤은 자고로 제대로 배워야하니까. 

그리고 어느 날, 규범에 맞춰 잘 자란 공주의 앞에 ‘너른 가슴과 떡 벌어진 어깨와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을 가진’ 용기 있고 매력적이고 잘생긴 왕자가 나타났다. 동화 속 한 장면처럼. 


그래서 그들은 그 후로도 행복했을까?


안타깝게도 공주의 내면에 어린 시절부터 억압받아 온 수다쟁이 비키가 있는 것처럼, 왕자에게는 낄낄 박사와 하이드 씨가 살고 있었다. 낄낄 박사 왕자를 사랑한 공주는 하이드 씨 왕자가 무서웠다. 

왕자를 온전한 낄낄 왕자로 만들기 위해 공주는 노력을 했다. 노오오오력을 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거나,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당신만을 사랑하고 지키겠노라고 맹세하지 않았던가요?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어떻게 해서든.”


공주는 노력했다. 왕자가 나이스 한 낄낄 박사로 돌아와 행복한 결혼을 이어가기 위해 최선을 다해 그를 도왔다. 하지만 왕자는 더더욱 공주를 보며 화를 냈다. 

나도 힘들다고. 

네가 잘못하고 있는 거라고.

너는 왜 다른 집 공주들처럼 하지 못하느냐고. 

힘들어 지친 공주는 어느 날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서>를 보게 된다. 


마샤 그래드가 지은 <동화 밖으로 나온 공주>의 일부이다. 

행복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공주의 여정을 따라 읽다가 책을 덮을 즈음, 책 속의 부엉이 박사가 남길 글귀에 눈길이 멈췄다.


“참된 사랑이란 적이나 경쟁자가 되어 상대방과 싸우는 일이 아니라 친구와 동료가 되어 다른 의견에도 동의하는 일을 뜻합니다. 

...

참된 사랑은 상대방을 깎아내리지도 않으며 잔인하게 대하지도 않으며 공격하지도 않으며 폭력적이지도 않습니다. 참된 사랑을 할 때 우리가 있는 곳은 감옥일 수 없습니다. 안전한 성채여야만 합니다.”



우리 집에도 공주님이 산다.

사실 나도 한때는 공주님이었다. 비록 지금은 우리 집 공주님의 무수리 신세지만 나도 사실은 공주님이었다. 

내가 공주님이었을 때 읽었던 동화책을 우리 집 공주님도 읽고 있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들은 그 후로도 행복하게 잘 살았다며 끝을 맺는다. 그리고 나는 그 마지막을 읽을 때마다 왠지 모르게 아이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아 불편하다. 

아니잖아. 현실은 그게 아니잖아.


대학 졸업반이었다. 

어학연수를 가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가 벼락같은 불호령을 맞아야 했다. 이유는 매우 단순했다.

시집도 안 간 딸을 어디 집 밖으로 돌리느냐는 것, 이게 이유였다.

여자 혼자서 가는 해외 연수는 위험하다고도 하셨다.

혼담이 오갈 즈음 예비 시아버지는 우리 커플이 당신을 따라 영주에 내려가 1박을 하며 어르신들과 당신의 친구분들께 인사할 것을 권하셨다. 

그때도 우리 부모님은 완강히 반대하셨다.

같은 이유였다.

어디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동화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것을 나보다 훨씬 전에 깨달으신 부모님은, 딸을 더욱 조신하고 얌전하고 예쁘게 잘 가르쳐 키우면 그 딸만큼은 동화 같고 드라마같이 살게 될 거라 믿으셨던 것 같다. 하지만 현 무수리 구 공주님의 현실은 일상이 전쟁이고 사기일 뿐이다. 

잠시만 긴장을 놓고 있으면 전통의 이름으로 막돼먹은 며느리와 효부 사이, 현모양처와 이기적인 여자 사이에서 가스 라이팅을 당하고 만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저 사람이 내 편인지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그 우리에 나는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게 꽃길만 걷게 해 주겠다던 저 남자와 계속 행복하고 싶은 것은 분명하다.

나는 행복하고 싶어서 결혼했다. 

전쟁을 벌이려고 결혼한 것은 아니지만, 행복하기 위해 기왕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면, 역시나 전선을 잘 그어야 한다. 

그리고 부디 저 전선 밖에 내 남편과 그의 가족이 있지 않기를 바란다. 저 선 밖에는 전통이라는 명분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관념만 홀로 있어야 하거든. 


 

‘내 말 잘 들어, 아가씨. 지금부터 하는 말이 제일 중요한 말이야.”

마법사 아줌마는 천천히, 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옛 시절은 모두 지나갔어. 그 시절의 위험도 모두 사라졌어. 이제는 마음 푹 놓고 자기 자신이 되어도 괜찮아.”





출처 및 인용
동화 밖으로 나온 공주 (마사그래드 저, 김연수 역. 뜨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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