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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Jul 15. 2019

이 죽일 놈의 야구

오늘의 수다

사람들을 만나러 잠실야구장 앞 지하도로 내려가고 있는데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병원에 입원 중이신 아빠의 조직검사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철이 없어도 심하게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그날의 스포츠 뉴스들은 엘지 트윈스 김광삼 선수의 완봉승을 전하기에 바빴다.



암.

암이라는 존재는 그때 우리 집에 발을 들였다.

운이 좋았다.

어깨 혈관 수술을 하시려 했던 건데 병원과의 문제로 취소되고, 다른 명의를 찾아 옮긴 병원에서 갑상선 암을 발견했다. 초기랬다. 이건 분명 다행, 그러니까 행운이 많이 온 것임이 맞을 테다.

초기라 항암은 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다. 수술 후에 방사선 치료와 약 처방으로 치료 방법이 정해졌다.

가족 모두 가장 힘든 고비는 지나갔다고 안도하려던 즈음, 병원에서 크나큰 미션을 던져줬다.


하루에 소고기는 살코기로 150그람을 꼭 섭취할 것. 넘겨도 안되고 부족해도 안됨.

간장과 된장은 유전자 변형 콩과 천일염을 사용하지 않은 것으로 할 것.


병원에서 보내준 안내문에는 환자와 보호자가 준수해야 할 식생활 내용이 더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저 두 가지가 가장 충격적이었다.

살코기야 구해서 계량하면 되는 문제라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유전자 변형 콩은 또 뭐란 말이며 천일염을 쓰지 않는 장이 세상에 있기는 하냐고 철없는 딸이 불평을 하는 동안 엄마는 조용히 장 담을 준비를 하셨다.

집안의 모든 그릇은 놋그릇으로 바뀌었고, 계량기와 식기소독기 그리고 성능 좋은 도시락통이 주방 한켠을 차지했다. 그렇게 주방의 풍경이 바뀌었다.

아, 밥상의 풍경도.


소고기 주먹밥. 소고기 불고기. 채소쌈. 된장국. 그리고 우리 엄마가 제일 잘하는 나물들.


그 후로 오랫동안 우리 세 식구는 암환자식 삼시 세 끼를 먹었다. 다른 음식이 먹고 싶으면 집 밖에서 혼자 사 먹어야 했다.

한 번쯤은 다른 음식들 좀 먹어도 된다며 온갖 구실을 갖다 대도 엄마의 요리에는 변화가 없었다.

음식에 관한 엄마의 창의력이 부족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세상 누구보다 아빠를 사랑한 엄마의 절박한 표현이었다는 걸, 철부지 딸은 알리가 없었다.


9년이 지났다.

아빠는 더 이상 나와 같은 하늘 아래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그때의 아빠처럼 암환자가 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암을 발견했고, 수술 전 검사에서 보이지 않았던 숨어있는 암덩이를 수술하며 제거했으니 다행도 이런 다행이 없을 것이다.

아빠와 암의 종류는 다르지만, 암환자식이라는 건 여기나 저기나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생협이 주변에 많아 믿고 먹을 식자재를 편리하게 구할 수 있다는 것과, 나는 나를 스스로 챙겨야 한다는 것 정도랄까.

아빠 곁에는 엄마가 계셨는데, 내 곁에는 다섯 살 난 어린 딸이 있으니까.

그때의 나는 철부지였고, 다섯 살 내 딸은 그냥 애니까.


약간의 고기와 된장국과 나물과 채소와 채소


그 시절 엄마 어깨너머로 본 것이 있다고 나를 위한 밥상을 차리다 보면 꼭 아빠의 밥상을 닮은 한 상이 나온다.

아빠는 이 밥상을 받으시며 투병 끝에 완치 판정을 받으셨는데, 내게도 그런 날이 올까.



1년 항암 중 한 절반 정도 왔나 보다.

순간순간 늘어지는 긴장감과 불안함 사이에서 오늘을 산다.

오늘자 스포츠 뉴스는 한선태라는 비선수 출신의 투수에 주목했다.

1군 첫 등판에서 1이닝 무실점을 했다고.

오늘은 심장 출력 검사가 있었다.

퇴근시간에 임박한 지하철 2호선은 역시나 북적였다.

9년 전의 나처럼 예쁜 구두에 레플리카 뻗쳐 입고 무심히 핸드폰을 보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이 내 시야에서 멀어지던 잠실운동장역.

문득 그날들이 떠올랐다.

아빠의 암 소식을 전하던 엄마의 목소리.

엄마의 절박함이 가득 담긴 밥상.

아빠의 외식을 책임졌던 도시락통.

그때와 너무나 닮은 나의 밥상.

그리고 여전한 이 죽일 놈의 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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