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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Jul 12. 2019

감자를 갈다가 네 생각이 났어

찌개도 못끓이던 여자

아이의 어린이집 가방이 묵직했다.

물놀이를 해서 옷이 젖었나 싶었는데 범인은 감자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아이들이 텃밭에서 감자를 캐기로 한 날이었다.


하지에는 감자랬지.

벌써 하지네.


날이 더워 식재료들은 가급적 빨리 먹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아껴봐야 다 상해 나가더라고.

그래서 오늘의 저녁 메뉴는 감자가 메인이다.

된장국을 끓이고 채 썰어서 볶고, 강판에 갈았다.

생선을 사다 무랑 같이 넣고 조림을 해도 맛있을 텐데 불을 많이 쓰고 싶지 않았다.

덥잖아.


사실 나는 감자전을 잘 부치지 못한다.

아니, 세상에서 전 종류가 제일 어렵다. 반죽의 농도와 불 조절에서 늘 실패를 거듭하거든.

하지만 오늘은 감자가 너무나 많고 먹고 싶으니까 도전을 한다.


감자전을 기가 막히게 잘 부치던 친구가 있었다.

고향이 강원도인 그 친구는 내가 집에 놀러 갈 때마다 뚝딱 감자전을 만들어 내주곤 했다.

강판에 쓱쓱 갈아서 지글지글 익어 나오던 친구의 감자전

감자를 좋아하지 않지만 유독 친구의 감자전은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플만큼 맛있었다.

 

"사실 믹서에 갈아도 되는데 나는 강판에 가는 게 더 좋더라."

나의 요리 선생 백주부가 믹서에 갈아 만들라고 했는데, 친구의 뒷모습이 생각이나 오늘도 나는 강판에 감자를 갈았다.


사회생활을 잘 못해서 대학원 첫 학기부터 고생을 좀 했다.

그때 내 손을 잡아준 게 그 친구였다.

바보가 된 것 같아 의기소침해져 있을 때, 기운 내라고 어깨 펴라고 정신 바짝 차리라고 툭툭 찔러준 이도 그 친구였다.

학위논문도 그 친구에게 제일 먼저 줬지 아마.

감자전 두 장과 커피 한 잔이면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웃고 떠들고 또 떠들 수 있었다.

그 친구는 지금 한국에 없다.

가까이 살면 온갖 구박을 받으며 못생긴 감자전 한 장을 매우 자랑스럽게 대접할 텐데, 친구는 미국인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한국 들어오면 만나자고. 바빠도 차 한 잔 하자는 인사를 끝으로 멈춘 대화창에 새로운 대화창을 붙였다.


한국은 감자가 철이야. 감자를 갈다가 네 생각이 났어. 잘 지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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