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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Jul 11. 2019

가을엔 토란국 겨울밤엔 배추적

찌개도 못끓이던 여자

"새댁이 이런 거 먹을 줄 알려나 몰라."


위층 할머니께서 배추적을 주셨다.

안동에 사시다가 사별 후 아들 내외가 사는 이 도시로 상경해 혼자 사시는 할머니셨는데, 손이 정말 크셨다.

내가 유모차를 밀고 집으로 돌아오는 걸 보시면 할머니 댁으로 놀러 오라고도 종종 부르셨는데, 그 덕에 참 많이도 얻어먹었다.

그날 우리의 저녁 식사는 배추적에 간장이었다.

위층 할머니께서 배추적을 주셨다는 내 메시지에 그는 칼퇴근을 하고 달려왔다.

그때는 그가 회사에 뼈와 영혼을 다 갈아가며 일을 하던 때였다. 그런 사람이 칼퇴근을 하고 왔다니.

그럴만도 했던 것이 배추적은 그의 소울푸드거든.

"우와 이 귀한걸! 잘 먹겠습니다!"를 외치는 그의 눈가가 이내 촉촉해졌다.


그와 나는 대체 연애를 어떻게 했을까 싶을 정도로 음식 취향이 달랐다.

내가 소고기 뭇국을 끓이면 그는 탕국이라고 했다.

소고기 뭇국이 왜 빨갛지 않느냐고도 따지길래 그 후로 한동안 그의 국그릇 앞에 고춧가루를 놓아주기도 했다.

미역국에 까나리액젓을 넣어 간을 맞췄더니 1박 2일도 못 보았냐며 이건 자기를 죽이려는 음모라는 억지소리도 했었고, 애호박국과 애호박볶음 그리고 계란찜에 새우젓을 넣었다가 징그러워서 못 먹겠다며 앞으로는 새우 눈이 보이지 않게 다져서 넣어 달라는 요구도 들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유치하기 짝이 없는데, 그땐 또 저런 걸로도 싸웠다.

그냥 젓갈은 대충 다져서 넣고 맑은 국에 청양고추를 듬뿍 넣어주면 될 문제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배추적은 노력을 한다고 해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배추를 요래조래 해가 이래저래 눅진눅진하게 해가 척 얹으면 된다고 했던가.

대체 배추를 가지고 왜 전을 부쳐먹는지 이해도 안 되는 고만 요래조래 이래저래 눅진눅진은 아무리 들어도 외계어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 말했다.

그 미묘한 맛을 기억하는 사람이 만들어서 내게 해 달라고.

그러니 어서 가서 어머니께 배워오라고.

그 후로 늦은 겨울밤이면 그는 배추적을 굽는다.

만들 때마다 내게 뭐라 뭐라 설명을 해주던데, 여전히 나는 하나도 알아듣지를 못하겠다.

"아 몰라. 빨리 구워서 줘."



그에게 배추적이 있다면 나에겐 토란국이 있다.

어린입맛에 그 미끄덩한 토란의 식감이 너무나 싫어서 추석날 아침이면 엄마가 국그릇 한가득 떠주시는 토란국을 먹는 일이 곤욕이었다.

"그냥 추석에도 떡만둣국 먹으면 안 되나." 그 시절 내 바람이었다.

결혼하고 맞이하는 첫 명절은 추석이었다.

나물도 있고 전도 있고 송편도 있고 흰쌀밥도 있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토란국이 없었다.

당연히 명절에는 탕국을 먹어야 한다고 했던가.

그랬다. 이 가족은 추석에 내가 소고기 뭇국이라고 부르는 탕국을 먹었다.

탕국이나 토란국이나 소고기가 들어가고 희멀건 하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왜 그렇게 허전하고 슬프고 엄마 생각이 났던지.

그 후로 추석날 아침이면 나는 토란국을 끓인다.

많이도 필요 없다. 딱 두 명 먹을 만큼만 있으면 된다.

엄마는 큰 유리 솥 한 가득 끓이셨는데 그에 비하면 내 것은 소꿉장난이다.

아, 아빠가 입원 중이셨던 지난 추석에는 많이 끓여 병실에 가지고 갔었다.

가을이니까.

추석이니까.

토란국에 흰쌀밥을 먹어야 하는 날이니까.

엄마가 끓인 것만은 못해도 드셔 보시라고.

내가 끓였다고.

내년엔 집에서 같이 드시자고.

내가 끓여 드리겠다고.

...

올 추석에는 토란국 담은 도시락을 싸서 아빠 계신 충혼당에나 다녀와야겠다.

토란국은 엄마가 끓이시겠지.


장마라는데 비가 오지 않아 걱정이다.

토란이랑 배추 맛있게 많이 먹으려면 지금 비가 충분히 와 줘야 하는데.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가을이면 토란국을 끓이고 겨울밤엔 배추적을 먹는다.

각자의 가족을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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