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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Dec 17. 2019

지름신이 오실 때면 나는 그날을 떠올려

독박육아 도치맘 에세이

연말이다.
찬바람이 불며 마음 한 편에도 한기가 느껴지는 소비의 계절.
이럴 땐 갖고 싶은 좋은 물건을 구입해 그 스산한 마음에 난로를 지펴야 할 것 만 같은 충동이 일곤 한다.
연말이잖아.
올 한 해 수고한 나에게 주는 선물, 뭐 그런 거.


나는 쇼핑을 참 좋아했다.
명절 연휴 끝물에는 꼭 백화점에 가서 그릇이라도 사 와야 직성이 풀리던 때가 있었다.
뭐라도 눈 앞에 아른거리면 꼭 가서 다시 들어봐야 하고 입어봐야 하고 가져와야 했던 시절이었다.

그날도 그랬다.
스타벅스 넓은 테이블에 앉은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하자면, 그 여자가 옆에 올려놓은 실버 컬러의 레이디 디올이 눈에 들어와 보름이 지나도록 눈 밖으로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 너무 예쁘다......’
그래서 남편과 아이를 대동하고 백화점 디올 매장을 찾았다.
“레이디 디올 실버 컬러로 보여주세요.”

어때? 이거 정말 너어무~ 예쁘지 않아?


하지만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을 뿐.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나 역시 조용히 매장 밖으로 나와버렸다.
그 예쁜 가방이, 나를 만나 중국집 철가방이 되어버렸거든.



그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까나쥬 패턴이, 세상에나 맙소사, 아이 낳고 푹 퍼진 나를 만나 철가방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 후로 한동안 나는 디올의 까나쥬 패턴에 대한 두려움을 앓았다.
어디 까나쥬 패턴뿐이랴.
분명 내 기억에는 이 가방과 옷과 구두의 조합이면 제법 세련된 도시 여자의 느낌이 나야 하는데, 어디선가 본 듯한 복부인은 누구신지...

별생각 없이 아빠 카드를 긁고 다니던 호시절도 지나갔고, 도저히 잡을 수 없는 속도로 도망가는 집값과 전셋값의 충격에 반 강제적 알뜰살림을 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백화점은 내게 너무나 먼 곳이 되어버렸다. 그동안 사다 쟁여놓은 것들을 사용하고 버리며 어쩌다 보니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삶을 살게 되었는데, 그래도 가끔은 sns에 올라오는 예쁜 물건들을 보며 소비 계획을 세워보곤 한다.
제법 진지하다.
그리고 사실, 가끔은 아니고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다.
오늘도 sns가 내게 보여준 명품 브랜드의 컬렉션들을 보며, 내일 당장 매장에 가서 스카프라도 지르고 오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고생했잖아.
연말이잖아.
이렇게 저렇게 할인하면 조금 더 저렴하게 득. 템. 할 수 있잖아.
요즘 들어 승률이 낮아진 지름신이 내 안에 강림한 순간, 나는 또다시 그 날을 떠올리고야 말았다.
철가방...
복부인...
지름신이 또 패배했다.

옷이 날개이긴 하지만, 사실 패완얼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지 않던가.
예쁘고 세련되게 꾸미고 사는 삶은 참 행복하지만, 소비가 나를 지켜줄 거라 믿었던 그 시절을 떠올려보면 그때의 행복이란 것은 그다지 밀도 높은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나 자신에게 자신만만하고 당당했던 시절이 나는 가장 밀도 있게 행복했다.
명품 액세서리는 없지만 청바지에 흰 티 그리고 하이힐 만으로도 충분히 예쁘던 그런 시절 말이다.
자세에서부터 느껴지는 당당함, 뭐 이런 거.
사실 나는 이런 과거를 “전생의 기억”이라 통칭하곤 한다.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이니까.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때가 그립고, 그 시절의 밀도 높은 만족감이 그립다.

내 인생에 또다시 그런 밀도 높은 행복과 만족감이 찾아온다 해도, 아마 내가 기억하는 그런 풋풋한 이미지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다. 대신 내 나이에 걸맞은 다른 이미지의 내가 존재할 테지.

부디 그때의 내 모습이 진주 목걸이를 한 돼지 같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생각난 김에 홈트라도 하고 자야겠다.
생각난 김에 팩이라도 하고 자야겠다.


부족한 글의 조회수가 만 건을 돌파했습니다.

읽어주시고, 공유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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