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지 Apr 16. 2020

힘내!라는 말은 사실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기 엄마의 투병일기

힘든 일이 몰려오던 때가 있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이 몰려들어, 힘들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마음뿐이던 시절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시기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며 버텼다. 내가 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그때 상처도 입었고 한차례의 인간관계 정리도 할 수 있었다.


그때 가장 듣기 힘들었던 말을 꼽으라면, 나는 “힘내” 와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를 말할 것이다.

나도 알고 있었다. 그 말의 의미가 응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상대는 이런 상황에 할 줄 아는 말이 딱히 없어서 그런 것임을 듣는 나도 알고 있지만, 사실 듣는 입장에서는 정말 듣기 힘들고 화가 나고 더 힘이 빠지고 사람을 기피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와 같은 병을 앓거나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의식적으로 힘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사실 나 역시도 위로하는 입장에서 “힘내”와 “기도할게요”를 빼면 딱히 마땅한 말이 생각이 나지 않곤 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가 최선일 때가 있곤 하다.



우연히 유튜브를 보다가 썸네일 하나에 눈길이 꽂혔다.


그렇지.
힘내라고 말해서 힘을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힘내라고 말을 하지 않아도 힘을 낼 수 있다.
이미 죽을힘을 다 하고 있는데 나보고 뭘 더 어쩌라고.

또 하나의 비슷한 말, “어쩌다가..”

아버지 상을 치르며 어쩌다가 그리 되셨는지를 의료사고 시점부터 구구절절 반복 설명을 하다가, 이렇게 하면 마음의 상처가 치유가 되나 궁금해지기도 했다.
암에 걸렸을 때도 그랬다.

그걸 어떻게 찾게 되었는지,

왜 그 병원에 갔는지,

누구는 수술만 하고 끝나던데 나는 왜 항암을 더 해야 하는지.


사람에 따라는 그 상황설명을 듣다가 자기가 궁금한걸 꼬치꼬치 캐묻는 경우도 있었다.
병원비는 얼마나,
의사는 어떻게,
병원은 환자를 죽이는 곳인데 왜,
아 그래서
근데 왜
아닌데 내가 들은 거랑 다른데
기도를 열심히 하면..


암에 걸리고, 수술과 치료를 진행하고, 아빠를 보내드리면서 수 도 없이 맞닥뜨린 상황이었다.

그 순간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들지만 계속 대답을 하고, 굳이 어려운 상황에 용기를 내어 용기를 외치고 연유를 묻는 사람들 사이에는, 인간으로서의 “예의”와 생각보다 빈약한 “어휘”가 존재하나보다.



최근 지인이 만성신부전증으로 신장이식을 받았다. 아이가 우리 아이와 친구인, 어쩌다 보니 나이도 나와 동갑인 아이 엄마였다.

사실 소식을 한동안 접하지 못해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라서, 느닷없이 접한 그 친구의 수술 소식에 나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지인을 통해 사정을 듣고 한참을 울었다.


어린아이 셋을 두고 그 힘든 몸으로 어떻게 견딘 거야.
애들 두고 수술 후에 그 몸은 또 어떻게 챙길까.
...
내가 같은 암으로 수술을 받고 같은 항암제로 치료를 시작했다는 소식에 싱크대 앞에 서서 엉엉 울었다던 지인이 오버랩되던 순간이었다.

한참을 망설이다 메시지를 보냈다.

많이 아팠다면서
소식 늦게 접했어
수술은 잘 됐겠지 

이런 시국에 정말 고생이 많다
부디 몸 챙겨
아이들은 이래저래 이것저것 방법이 있더라

내가 아는 것들은 이러저러한 것인데, 그쪽에서도 한 번 찾아보고
부디 몸 챙겨
좋은 날 우리 서로 좋은 모습으로 만나자
지난 얘기는 그때나 웃으면서 하자

한참 지나 답장이 왔다.
어찌 되어 그리 되었는지의 상황이 소상하게 적힌 쪽지였다.


수술 직후의 나는, 모든 위로의 말이 다 버겁고 힘들어서 아예 모든 메신저를 끊어버리고 살았는데 그 친구는 달랐다.
너무나 착한 사람.
그래서 또다시 나는 미안했다.


영상 속 화자가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냈다.

묻지 마 살인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의 이야기였다.

그 아버지가 지나갈 때면 사람들이 달려와

어쩌다 그리 되었냐 묻고

괜찮으냐 묻고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하니 힘을 내라 했다던가.


사실, 사연이야 뉴스를 보면 알 것이었고
아픈 것은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어떤 모양으로든 아물 일이다.


어쩌다가
그래도 힘내야지
산 사람은 살아야해 ... 이게 과연 위로였을까.

괜찮으냐 물으면 힘들어도 웃으며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씩씩하게” 잘 이겨내고 있다는 걸로 마무리되는 대답의 정석 같은걸 그 아버지도 겪으셨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어렵다.
힘들어봤으면서
그 심정과 상황을 알면서도
위로자의 입장은 언제나 어렵다.

그나저나 그 친구는 어떻게 지내려나 모르겠다.
가까이나 살면 반찬이나 가져다 줄텐데.

내가 애들이라도 좀 봐줄 텐데.


매거진의 이전글 찬란해서 슬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