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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Mar 25. 2020

찬란해서 슬픈

아기 엄마의 투병일기

나무 납골함을 품에 안고, 올림픽대로에서 동작대교 남단으로 내려가는 길.
버스 앞 유리창에 비친 한강의 찰랑거림이 너무나 찬란했고 현충원으로 들어가는 길에 핀 봄꽃들이 너무나 싱그러웠다.
화장터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빠의 납골함은 여전히 따뜻했고, 눈 앞에 보이는 그 찬란한 아름다움에 내 눈시울은 뜨거웠다.

그랬다.
작년 이맘때의 나는 아드리아마이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대머리였었고, 그래서 상을 치르는 내내 가발을 쓰고 있었다.
아이 어린이집에 갈 때는 잘만 쓰고 다녔던 두건인데, 상 치르고 돌아오자마자 두건 마저도 벗어버렸으면서, 이상하게 아빠 마지막 가시는 길에는 이런 꼴을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그냥 마음이 그랬다.

작년. 아빠 가시고 일주일 후, 현충원의 봄


어느새 일 년이 지났다.
그 사이 표준치료가 다 끝났다.
그리고 애매하게나마 앞머리를 묶을 수 있을 정도로 머리도 자랐다.
시간은 무심하게도 지나 아빠의 첫 기일이 돌아왔다.
여전히 한강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봄꽃들은 촉촉한 꽃망울을 터트렸다.


근데 항암탈모 진행되면 눈썹도 없는데..

아파. 근데 희한하게 참아진다.
몰라 자꾸 엄마 생각 나.
엄마 진짜 아프게 갔잖아.
진짜 고통스럽게 갔어  나 때문에.
그래서 그런가, 아프면 나도 그래.
엄마는 이것보다 더 아팠겠지.
근데 내가 이거 하나 못 견딜까.
이런 생각이 들며 참아져.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 영상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얘기 같아서.
자식이라고는 나 하나라서, 상주가 하필 아파서 제대로 예를 갖춰 상을 치러드릴 수 없으니 제발 제발 연명치료를 해달라고 부탁을 했던 자식이 나였다.

허례허식과 겉치레를 경멸하셨던 분이셨으니, 이건 순전히 내 상황과 미련 때문이었으리라.
결국 아빠는 온갖 의료기술로도 더 이상 연명이 안될 상황에서 떠나셨다.
내가 방사선 치료를 마친 바로 다음날이었다.

아빠가 병원에 계실 때, 하필 그때 나는 암 선고를 받았다. 의사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오래 사시진 못할 거라 했지만, 그래도 내가 표준치료를 다 마칠 때 까진 버텨주시겠다 약속도 하셨었는데 그렇게 떠나셨다.

그게 최선이셨겠지.
전쟁에서도 살아 돌아오고 여러 번의 심정지와 쇼크에서도 매번 기적처럼 회복해 낸 정신력으로 끝까지 버티셨던 것 같다.


그 정신력.
항암이 막바지로 갈수록 혈관이 숨고 버티는 힘이 떨어져 매번 고생을 했다. 고열로 응급실에 입원할 때면 다리와 발에 여러번 주사에 찔리곤 했다.

솔직히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그래도 괜찮다며 참고 견뎠는데, 사실은 그때마다 아빠 생각을 했다.

‘아빠는 이것보다 더 아팠을건데.’

...

코로나 19로 현충원의 풍경도 다소 달라졌다.
교구 목사님께서 약식의 추모예배 양식을 만들어주셨는데, 그마저도 제례실 이용이 힘들고 불안해서 제대로 예배를 드릴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냥 가면 서운해하실 것 같아, 아빠 계신 곳 앞에 서서 생전에 좋아하시던 찬송을 혼자 낮으막히 불렀는데 왜 목은 메이고 음은 갈라지는 건지.
뭐 딱히 할 말도 없었는데 발걸음은 왜 그리 무거웠던지.

첫 기일. 다시 찬란한 봄이 돌아왔다.


있잖아.
작년에도 올해도 어제는 참 햇빛이 곱고 꽃도 나뭇잎도 색이 고운 날이었는데, 나는 왜 이게 그렇게 슬픈지 모르겠다.
나는 봄이 참 좋은데.

건너편에서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말을 이었다.


우리 아빠는 단풍이 절정이던 가을에 가셨거든.
그래서 나는 있잖아, 가을이 슬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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