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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May 02. 2020

나로 살기 위해 글을 씁니다.

오늘의 수다

그깟 20여분 운동을 했다고 심장이 요동을 친다.
 나이 서른여덟.
2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고 석 달 전에 항암을 마쳤다. 처음 시작할 때 들었던 것처럼 독성 항암에 심장기능이 약해졌고, 그래서인지 모든 일이 숨에 부쳤다.

스무살의 나는 서른여덟의 내가 이런 모양으로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때는, 그때의 나는 내가 마음먹은 것은 무엇이든   있을  알았다. 그랬다. 그때의 나는 그랬다.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고, 원하는 공부를 했고, 원하는 학위도 받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하고 싶은 게 많아 인생을  돌아오느라 나이가 많았던 여자 석사 나부랭이를 받아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른살의 나는 결혼을 했다.
결혼을 했고, 작은 시민단체에서 일을 했고, 임신을 했고, 퇴사의 명분을  해고를 당했고, 출산을 했다.
불과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세상에 상당히 쓸모 있는 사람이 될 거라 믿었는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젖먹이 어린아이와 손이 많이 가는 남편과 연로하신 부모님이 계신 집뿐이었다.

현실을 인정할  없었다. 답답하고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냥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팔자 좋게 유모차 밀고 다니는 애엄마로 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생각했다.
계속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고.
그래서 계속 발버둥을 쳤다. 백조도 아니고 오리도 아니면서 계속 발버둥을 쳐댔다.

10살의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게 소설 작가인지 방송작가인지 구체적인 것도 모른 채, 그냥  이야기를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읽는 걸 좋아했고, 글도 제법 잘 써서 관내 백일장이 열리면  상을 받곤 했다. 그때의 성취감 때문이었는지 글을 써 내려가는 일이  어린 나이에도 너무나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했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유명 작가 라던가 인기 작가 이런 것도 모르던 시절, 그냥 나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엄마는  꿈을 못마땅해하셨다. 
하나뿐인 딸이 얌전히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고, 시집도  가서 보란 듯이  살기를 바랐던 우리 엄마는, 하라는 공부나 열심히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며 당신이 살지 못해 당신이 살고팠던  다른 삶을 내게 투영했다.
엄마는 네가 남의  따위를 옮기는 천한 일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작가는 좋은 직업이 아니야.”
 손을  쥐고 진지하게 한마디 한마디 던지던 엄마의  눈빛을 나는 거역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작가의 꿈을 접었다.
작가 대신 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암에 걸렸다는 소식을 들은 지인이 투병에 대해 조언을 해주던 중이었다. 자신이 블로그에 남겨놓은 투병일기를 보면   자세한 내용들이 있다는 말에 머리가 울렸다.
투병일기.
그래 살지 죽을지도 모르는데 기록이라도 남겨보자. 이대로 죽으면 억울하잖아.’
따지고 보면 그저 억울하고 분해서 시작한 글쓰기였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오랜 기간 방치해뒀던 블로그에 올렸다.
 스스로의 만족을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어느 순간 꾸준히 읽어주고 반응해주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독자들 때문에라도 나는 계속 글을 써서  근황을 알리고 정보와 생각을 전하는 작업을 하게 됐다. 
시작은 독박 육아를 하며 주변의 도움 없이 독박 투병을 하는 흔하디 흔한 아기 엄마의 일상이었고, 쓰다 보니 환장할 결혼생활을 하며 느끼고 깨달은 것들을 기반으로 가부장제의 모순에 반박하는 글까지 범위가 늘어났다.
제법 나름 독자도 늘다 보니 기분이 좋았다. 살아있는 기분을 느꼈다고 해야 할까.
대체 무슨 글을 쓰기에 그렇게 열심히냐는 남편의 질문에 ‘ 1/3 당신 욕’이라고 대답할 정도로, 그렇게 나는 차곡차곡  안에 응어리진 화를 글로 녹여내 나를 살렸다.

어느 날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플랫폼을 접한 건  오래전이었다.
은혜야 너도 이런 거 생각해봐.”
전 세계를 유랑하며 만난 이들을 인터뷰한 글이 실린 링크를 친구가 보내준 것이 시작이었는데, 그땐 그냥 읽고 흘려보냈었다.
. 내가 이런 걸 어떻게 하겠니. 나는 지금 하루 종일 집에서 애랑 사람 말 같지 않은 말이나 하고 앉아있는 처지인걸.” …
말은 그렇게 했어도 뇌리에는 남아있었나 보다. 
어느 날 또다시  눈앞에 나타난 브런치를 보고 생각했던걸 보면.

나도    아는데.
 이미  쓰고 있는데.

브런치 작가에 선정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선정이었는지 합격이었는지.
어쨌든 생전 처음 듣는 작가라는  단어에 심장이 멈춘듯했다.
비록 독자는 개미 걸음처럼 늘고, 조회수는 폭발했다는데 좋아요와 댓글은 가뭄에 콩 나듯 달려도, 작가가 되어 나의 삶과 생각을 글로 풀어낼  있다는 사실이 가슴 벅차게 기뻤다. 언젠가는 나도  이름으로 책을 출간한 진짜 작가가 될 거라는 상상에 행복했다.
현실은 비록 변함없이 빠듯한 살림을 꾸리고 아이를 홀로 챙기며 항암치료를 받는 그저 그런 주부의 삶이었지만, 뭐라도 읽고 뭐라도 생각하고 뭐라도 써서 고치고 다듬어  이름으로 글을 발행하는  순간만은 온전히 나였다. 그리고 글에 공감해주고 마음을 나눠주는 이들이 생길 때마다, 독박뿐인 세상에  홀로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낄 수 있었다.
내가 살아있구나. 내가 살아있는 글을 쓰고 있구나.’

내가 온전히  스스로의 삶을 살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어 행복했다.

오늘도 나는 약해진 심장이 조금이라도 강해지기를 바라며 운동을 했다.
아니. 오늘은 대체 집에서 하는 게 뭐냐는 망언을 던진 남편을 생각하며 강도 높은 운동을  악물고 버텨냈다고 하는 편이 조금  정직하겠다.
운동이 끝나자 땀은 비 오듯이 쏟아지고 심장은 터질 듯 요동을 쳤으며, 이를 감지한 스마트밴드는 심장 강화중이라는 메시지를 띄웠다.
땀을 식힐 겸  한잔을 끓이려던 찰나, 그저께 새로   생각이 났다.
나의 삶과 일을 폄하하는 남편의 말에 대한 분노와 주변을 챙기느라  스스로는 챙기지 못한 삶에 대한 반성을 담은 글이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열었다.

한국에서 여자의 삶이란 60 되었고 29살의 외동딸을 키웁니다.

지금 시간 내서 준비하는 모습 정말 좋아요.
 포기하지 말고 본인을 위해 노력하는 삶을 가지세요.”
나와 같은 병을 앓았다는 어떤 분의 마음이 장문의 글로 남겨있었다.
 
땀은 여전히 비 오듯 쏟아지고 심장은 여전히 요동을 쳤으며, 나는 새로 도착한 독자의 공감에 털썩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나는 여전히 이모양이다.
암투병일기와 결혼과 가부장제에 관해  글은 나로 하여금 인생 가장 힘든 시간을 버텨내게 만들어주었지만, 그렇게 내가 자식처럼 세상에 내놓은 글을 담은 투고에는  달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답신 하나가 없다.
매일 아침마다 메일함을 확인하고 현실에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멈추지 않고 글을 쓰고,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책을 읽는다.
작가가 되어 글을 쓰는 순간이 나를 온전히 나로 살아가게 만들어주기에 나는 멈추지 을 것이다.

나는 나로 살기 위해 글을 쓴다.
결국 나는, 나로 살기 위해  이야기를 쓰는 그런 작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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