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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May 24. 2020

아버지의 입맛을 이해하게 되는 나이

찌개도 못끓이던 여자

“잘 봐. 멍게는 여기 주둥이를 이렇게 자르고 손가락을 넣어서 빙그르르 돌려서 빼. 잘 봐 뒀다가 이따 황서방이랑 맛있게 먹어야지. 아니다 엄마가 해주고 갈게.”


이른 아침. 친정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현충원의 문이 열렸으니 아빠를 뵈러 가자는 내용이었다.
코로나 19로 모든 곳이 ‘잠시 멈춤’이었던 동안 현충원도 마찬가지로 문을 닫아걸었다.
능수버들이 흐드러졌을 올해의 봄은, 모르긴 몰라도 동작동에 계신 영혼들도 적잖게 당황스러우셨을 듯하다.
봄 내내 할아버지를 보고 싶어 했던 딸을 데리고 모녀 삼대가 현충원으로 향했다. 소박한 꽃 한 송이를 아이 손에 들려 몇 달 만에 간 충혼당은 초여름의 진 내음이 분향단의 향내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채 손님을 맞이했다.

“할아버지는 죽었잖아. 그래서 이제 만날 수 없어.” 라며 엄마의 가슴에 여러 번 확인사살을 일삼던 딸은, 할아버지가 보고 싶었다며 납골당 앞에서 한참을 중얼중얼 인사를 나눴다.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코로나 도깨비 때문에 올 수 없었어요.
할아버지 재희 예뻐해 줘요.
할아버지 사랑해요.

우리 옆 칸에 누군가는 영감을 찾으며 통곡을 하셨고, 저쪽 어딘가에는 그동안 못 온 이유를 소상히 설명해 올리는 어느 댁 아들이 있었으며, 양손 가득 음식을 챙겨 들고 제례실로 향하는 가족들의 발걸음이 참으로 분주했다.



이날의 저녁 반찬은 멍게였다.
항상 무엇이든 넘치게 사시는 엄마가, 이번에는 멍게를 많이 구입하셨다며 우리 집에도 나눠주셨기 때문이었다.

멍게와 해삼
매년 봄가을이면 우리 세 식구는 멍게와 해삼을 즐겨 먹었다. 바다 가까운 도시에서 나고 자라신 엄마의 취향 때문도 있었겠지만, 사실은 아빠가 좋아하시는 음식이기도 했다.

“해삼만 먹지 말고 골고루 먹어봐. 멍게 향이 얼마나 좋은데.”

해삼의 오도독 씹히는 식감이 재미있었던 나는, 아빠의 권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해삼만 먹었다.
낙지는 산채로 산낙지는 참기름에 먹어야 제맛인 것처럼, 초고추장 찍어 흰쌀밥과 먹는 해삼은 그야말로 꿀맛이었거든.
솔직히 말하자면, 그 나이의 나는 멍게의 씁쓸한 뒷맛이 싫었다. 아빠는 대체 이게 어떻게 향긋하고 맛있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을 해 내 살림을 하게 된 후로도 우리 집 밥상에는 멍게가 오를 일이 없었다.

“이 계절에 먹는 멍게가 보약이래.”
친구가 줬던가 엄마가 주셨던가.
여하튼. 네가 먹기 싫으면 너네 신랑이라도 먹이라며 멍게 한 접시가 생긴 어느 날이었다.
정말 맛있다며 딱 한 점만 먹어보라며 권하는 남편의 극성에 딱 한 점 집어 먹어봤다.
향긋했다.
내 미각이 기억하고 있던 그 쌉싸래한 뒷맛은 전혀 없었다. 그저 달큼하고 매끄럽고 향긋한 바다향만 가득했다.
마치 향 좋은 와인을 마셨을 때의 여운처럼, 목구멍을 넘어 코 뒤쪽 어딘가까지 남는 그 바다의 향에 무릎을 쳤다.
‘아! 이거구나!’
30년 전에 아빠가 말씀하신 멍게의 맛이라는 게 바로 이거였구나... 단번에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바로 이 맛이었나 보다고
이제 입맛까지 아빠를 이해하게 되는 나이가 된 거냐고
우리 아빠가 멍게를 참 좋아하셨다고
중얼중얼 울먹이며 그날의 멍게는 내가 다 먹어버렸다나.


그 후로 멍게를 먹을 때면 돌아가신 아빠 생각이 난다. 언젠가는 봄나물을 먹을 때마다 엄마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오겠지.
엄마표 나물 무침을 빨리 배워야 하는데, 왜 나는 만들고도 기억이 나지 않아 매번 다시 묻게 되는지 모르겠다.

오늘 저녁 밥상은 친정엄마가 손질해주신 멍게와 엄마가 만들어주신 봄나물들로 한 상을 차렸다.
오랜만에 외할아버지를 만나고 왔다며, 현충원 장군 묘역에서 꿩 한 마리도 봤다며 종알종알 대는 딸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이 밥상의 풍경 또한 오래도록 추억하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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