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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May 27. 2020

할머니와 정의연 그리고 야만의 시대

오늘의 수다

종군위안부, 정신대, 일본군 성노예 라는 표현은 옳지 않습니다. 이에 관한 피드백을 받고 글을 고치려 했으나, 할머니와 정의연이 지나 온 지난 시간을 글에 담는 의미로 고치지 않습니다.

대신, 알립니다.

일본군 위안부 가 맞는 표현입니다.




대학생 때 종군위안부 할머니가 학교 축제에 오셔서 특강을 하신 적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대강당이었는데... 도 텅텅 비어있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 자리를 마련한 단체는 종군위안부 문제 해결에 관심을 갖고 있는 대학생 모임이었다.
여하튼.
박 씨 성을 가지신 할머니가 오셨는데, 이야기의 말끝마다 “아이고 나는 기억을 못 해요” “나는 몰라요”라며 마무리를 지으셨던 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어린 학생이었던 나는, 할머니가 연세가 많으셔서 벌써 기억에 어려움이 오신 건가 싶었다.

이용수 할머니의 발언 하나하나를 보다가 문득 저 장면이 떠올랐다. 이 나이가 되어 그 기억을 곱씹다 보니 얼핏 할머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의미는 곧 정의연이 잘못했다와 같은 뜻은 아니다.



생각의 첫 단추는 그 인권운동가라는 호칭부터 시작한다.
할머니들은 피해자이자 당신 스스로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인권운동가라고 했던가. 그래서 미국으로 유럽으로 고령에도 불구하고 진상을 알리려 노력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언론에서 조명한 기억이 난다.

인권운동가.
말은 좋지. 인생 가장 아프고 아픈 시간을 수시로 꺼내 사람들 앞에 밝혀야 했던 그 속은 과연 어떠했을까 싶다. 사람들은 할머니들이 한없이 안쓰럽고 할머니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앞장서는 정의연을 한없이 훌륭하다 했겠지만, 그들 안에서의 감정 사정은 밖에 있는 사람들이 예상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 테다.
인권운동가.
그 멋져 보이는 호칭으로 위로받고 그 호칭이 족쇄라 느끼셨을 수 도 있다. 이 나이가 되니, 그때 그 강당에서 그렇게 말끝을 흐리셨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분께는 그 순간이 아마.. 고통이셨을 거다. 그 고통을 감내하고 진짜 세대로 된 사과를 받기 위해 참으셨던 것이겠지.

그렇게 그들은 함께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할머니들은 일본의 제대로 된 사과와 명예회복을 위해, 정의연은 그 과거사 회복을 위해.


이건 누가 누굴 이용했다 할 관계가 아니라고 본다.
할머니들만 계셔서 될 일도 아니었고 단체만 있어서 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내가 기억하는 30여 년 전에만 해도, 종군위안부 -정신대 - 할머니들의 활동에 대해 안타깝기는 하나 대체 뭐가 당당하다고 저렇게 얼굴을 들이미느냐는 여론이 지배적 있었다. 이런 시기를 견디며, 국가도 거의 외면하다시피 한 과거의 문제를 공론화시키고 이 정도로 끌고 올라오기까지에는 정의연 실무자들의 노력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들도 같이 가신 거지.
그들의 표현대로, 할머니들도 같이 활동을 하신 것이다.

이에 윤미향 대표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대해 배신이라 하신 할머니의 그 말속에서, 나는 당신이 갖지 못한 기회에 대한 분노 혹은 아쉬움을 느꼈다. 이 부분에서는 작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일했던 경험이 작용한 것 같다. 단체에서 오래도록 함께 “활동”한 선배 활동가, 이래저래 시기도 운때도 맞지 않아 더 높이 성장하지 못한 이의 지극히 인간적인 한(?)에 들들 볶였던 적이 있다.
할머니도 오래전에 어느 당 공천에서 탈락하셨다한다. 그 기사를 보고서, 그 긴 시간 동안 위안부 할머니가 단 한 분도 국회에 들어가지 못하셨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다문화사회를 대표할 사람 장애인 인권을 대변할 사람 등 그렇게 다들 공천을 받아 들어갔는데, 정작 역사의 피해자이자 산증인이며 직접 해결을 위해 나선이 에게는 그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건 윤 대표의 잘못도 정의연의 잘못도 아닌, 위안부 할머니들께 그냥 “피해자로서의 자리” 이외의 것을 허락하지 않은 우리 사회의 잘못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안다. 그때에는 시기상조였을 수 도 있다고.
응, 인정.
하지만 과거야 그렇다 쳐도 개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분하고 속상할만하다.

‘그러게 그 당은 왜 공천에서 탈락을 시켜서는-’

사정을 몰라 미안하지만, 솔직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위안부 후원으로 들어오는 돈이 다 위안부에게 가지 않았다는 지점은, 참 이걸 뭐라 설명해야 할까.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당신들을 보고 들어오는 돈이니 당연히 다 할머니들께 가야 했던 게 옳다고 생각하셨을 수 있다. 그러나 정의연이라는 단체와 거기에 속한 사람들은 그 일에 헌신을 했을 뿐 노예가 아니다. 단체를 운영하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 삶을 유지하고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돈은 필요하다.
또한 할머니들의 생활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국가에 있다. 국가가 외면하던 것을 이 정도로 개선시킨 그 단체는, 이제는 국가가 해주는 그 이외의 것을 챙겨야 하는 게 맞다. 정의연이 얼마나 큰 단체로 소속되는지 모르겠다. 규모가 한 경실련쯤 되나?

얼핏보니 경실련의 평균 연봉이 ㅁ일보보다 3천만 원 좀 넘게 적게 받던데, 신문사가 그만큼 많이 받는 걸까 경실련의 연봉이 그 정도로 적은 걸까.

시민단체라는 곳들이 그렇다.

관여하고 감시하는 눈은 많고, 할 일은 정말 많은데, 돈은 되게 없는 곳이 작은 시민단체다. 할머니들 비행기 값으로 늘 예산이 쪼들린다는 그 단체에서 과연 뭐 얼마나 뒤로 챙겨 드실 게 있었으려나 모르겠지만, 그거야 밝혀지는 걸 보면 알겠지.


나는 이 문제를 정의연과 위안부 할머니의 갈등, 혹은 정의연의 사기극처럼 자극적인 제목과 프레임으로 끌고 가는 것이 너무나 불편하다. 대체 그런 식으로 기사를 쏟아내 가십거리를 만들어 좋을게 뭐란 말인가. 이건 세간에 가벼운 입방아로 오르내릴 일도 아니고, 양쪽 진영에서 기싸움에 쓸 일도 아니다.
이쪽에서는 단체를 비판하고, 저쪽에서는 언론과 할머니의 배후에 있는 무언가를 비판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남는 건 뭐란 말인가.
정치인들이 정말로 국가라는 존재를 위하는 사람들이라면 좀 대승적으로 생각을 하길 바란다.

정말이지 매일매일 이 이슈에 관한 기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려온다. 활동가 한 사람의 인생은 차치하고라도, 할머니와 할머니들의 한 평생의 한을 풀겠다는 그 숭고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 아닌가.
단원 신채호 선생님께서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하셨다던가. 진위여부를 떠나 나는 이 말씀에 동의한다.
할머니들의 과거는 우리의 역사이다.
언제가 다시 그런 날이 혹여나 온다면, 우리가 우리의 딸들이 다시 그런 짓을 당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그 시절의 우리를 감싸지 않고 돕지 않는다면, 훗날의 우리는 누가 지켜줄 것인가.
지금 이 사단은 과연 누구에 의한 무엇을 위한 난리란 말인가.

이날 나는 아이에게 “과거형”으로 설명을 해줬었다. 내가 경솔했다.


할머니의 분노에는 백번 공감한다. 하지만 정말 제대로 된 언론이라면 양측의 갈등이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시작되어 여기까지 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가야 할 지와 같은, 좀 생각을 하고 긴 호흡으로 풀어낸 기사가 나와야 하는 게 맞다.

할머니의 분노.
할머니 윤 대표 온다는 소식에 잠적.
정의연 부정부패. ...

언론고시생 중에서도 가장 성적 좋은 순서대로 들어간다는 언론사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악의적인 속보성 기사를 볼 때면, 그저 눈 앞이 깜깜해진다.
양심도 국가관도 세계관도 없는 것 같다.
그저 자극적인 기사, 사람들의 가십을 끌 기사면 되나 보다. 정말 무서운 건, 저렇게 하나 둘 밀려내려 오는 기사들이 결국 프레임을 만든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써 내려가는 그 글이 어떤 독을 품은 칼인지는 아는지 모르겠다. 누구를 섣불리 비판할 수도 없고 전선을 함부로 그어서도 안 되는 사안인 게 너무나 명확한데 말이다.

​오늘도 이쪽에서는 부패한 단체가 할머니를 이용했다며 떠들고, 저쪽에서는 음흉한 무리가 할머니를 이용해 정의연을 공격하고 이간질시키고 있다고 떠든다. 역시나 오늘도 머릿속이 혼탁해지는 그저 자극적인 문구들로 가득한 기사가 포털을 도배했다.
사람들의 평균 학력은 높아졌고 정보가 홍수처럼 넘쳐나는 시대라는데, 어째 이 시대를 사는 배울만큼 배우신 분들이 이리도 야만적인지 모르겠다.
나와 내 딸이 앞으로 살아갈 세상의 수준이라는 것도 딱 이 정도, 배울만큼 배웠으나 가볍기 그지없는 이런 시대일 것 같아 한 없이 슬플 뿐이다.



새벽에 이 글을 써놓고 포스팅을 망설이는 사이
이해찬 전 대표가 한마디를 했다는 뉴스가 떴다.
나는 이 사람을 정말 진심을 다 해 싫어하지만,
이번만큼은 인정.
당신의 말에 동의.
https://n.news.naver.com/article/032/000301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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