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지 Jun 11. 2020

자식을 낳는다고 부모가 되나

독박육아 도치맘 에세이

자식을 낳는다고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고

친부모여야만 부모다운 부모가 되는 것도 아니다.

요즘 유독 이런 생각이 자주 든다.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으면 사람이 된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은, 아무리 봐도 틀렸다.


의붓아버지가 자기 자식의 손을 뜨거운 팬에 넣고 학대하는데도 방임하는 어미라니

의붓자식이라고 캐리어에 아이를 넣어 죽이는 어미라니

신생아가 배가 고파 우는 게 시끄럽다고 집에 두고 나와 배 굶어 죽게 되도록 나가 놀은 부모라니

다들 그 벌을 어떻게 받으려고...


우는 신생아를 집에 두고 밤마다 놀러 나갔던 여자를 나는 안다.

가끔 아기를 보러 갈 때면 그 여자는 늘 처마 밑에서 담배를 피우며 모유수유를 하고 있었다.

밤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혼자 우는 아기가 안쓰러워,

주인집 할머니께서 분유를 타 주고 똥기저귀를 갈아주셨다던가.

우리 엄마는 그 여자에게 마음 잡고 좋은 부모 되라며,

내가 쓰던 아기 때 물건들을 물려주고 챙겨주셨다.

하지만 그 여자는 전남편과 세 딸들을 버렸던 것처럼 새 남편과 아들을 버렸다.

그리고 몇 년 후, 새로운 남자와 교통사고를 당해 몸의 절반이 으스러졌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어제는 하루 종일 화가 치밀어 오르는 날이었다.

골프모임에 정신이 팔려 나와 아이를 뒷전으로 미룬 남편에 대한 분노로, 하루 종일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던가.

칼로 물을 베는 것만큼 부질없어 보일 수도 있지만, 점점 칼이 넓어지고 마음의 그릇이 작아지면 칼이 물을 갈라 나눌 수 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럼에도, 아직은 칼로 물을 베지 못해서 그 분노라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더위가 사그라들듯 화가 사라지자, 뜬금없이 예전에 소식이 끊긴 한 집이 생각났다.

나와 동갑인 남자 아이네 집이었다.

우리 아랫동네에 있던 큰 아파트 단지에 살았고, 그 댁 아저씨도 우리 아저씨들처럼 불구인 처지가 비슷해서 우리 집단촌에 자주 놀러 오셨다. 그때마다 아저씨의 곁에는 아저씨가 끔찍이도 아끼던 아들이 있었는데, 아빠와 아들의 사이가 정말 너무나 좋아 보였다.

그 시절의 나는 아빠가 몸이 불편하시고 엄마가 바쁘다는 이유로 늘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했던지라, 아빠와 낚시도 가고 볼링도 치러 다니고 수영도 다니는 그 아이가 나는 참말로 부러웠다.

물론 우리 아빠는 전쟁수행 중 머리에 총상을 입은 1급 중상이자이고 아저씨는 파독 광부로 가셨다가 사고를 입으면서 다리를 못쓰게 된 경환자이니 당연히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 시절에는 그게 그렇게나 부럽고 야속했었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던가 2학년 때였던가, 아저씨가 돌아가셨다.

버거씨병이라고 했다.

아저씨처럼 사지 어딘가가 절단된 환자들은 복병처럼 그 병이 숨어 힘들게 한다는 걸 그때 알았다.

상을 치르고 우리 동네에 인사를 온 그 친구의 축 처진 어깨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엄마와 이사를 간다고 했던가.

쥐꼬리만큼 나오는 미망인 연금도 못 받을 텐데 한참 자랄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사느냐며,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하늘도 야속하시지, 그 좋은 사람을 왜 그리 빨리 데리고 가셨느냐며 모두가 슬퍼했다.

그날 알았다.

그 친구가 아저씨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집단촌에는 유독 업둥이들이 많았다.

그 덕에 나도 아빠와 닮은 아이를 입양해 키우다 보니 서로 닮아가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고 자랐다.

어쨌든 그랬다.

내가 한 동네에서 나고 자라며 뛰어놀던 언니 오빠들의 한 절반은 업둥이었다. 성인이 된 이후에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사실이 그랬다.

군에서 다쳐 불구가 된 사람들은 상해 정도에 따라 등급이 나뉜다.

하지만 이 등급과는 별개로, 이들은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생식능력을 잃은 사람과 잃지 않는 사람.

내 새끼가 갖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아저씨들은, 그 나름의 방법으로 사셨다.

친척의 사생아를 친자로 들여 친자식 그 이상으로 키우기도 했고,

시험관 기술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 과학의 힘으로 아이를 낳기도 했고,

그저 운명이려니 두 내외 호젓하게 사시기도 했고,

아이가 있는 젊은 과부와 결혼해 가정을 완성하시기도 했고,

이른 새벽에 누군지도 모를 사람이 현관 앞에 두고 도망간 핏덩이를 친자 삼아 살기도 했다.

각자 자기의 삶이 생긴 대로 그 인생을 살았지만, 그 그늘 아래에서 자란 우리는 다 똑같은 누구네 집 아들딸이었고, 그분들은 최선을 다 해 내 자식을 키워낸 부모였다.

자식은 이런 사람이, 아니, 부모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부모는 이렇게 되는 것이다.


자식을 낳아서 부모가 되는 것이라면, 과연 짐승과 다를게 무어란 말인가.



나한테 사과해.
엄마라는 이유로 하루 종일 애랑 집에만 있는 사람 취급한 거, 사과해.
아이한테도 사과해.
일주일을 기다려 아빠 보고 공원 나가 달라고 부탁한 아이 데리고
집 아래 로비에서 20분 킥보드 타게 해 주고 혼자 놀러 나간 거 사과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도 그것보단 더 잘 놀아주겠다!



악에 잔뜩 받친 메시지를 쓰고 있었다.

남편에게 보낼 것이었다.

"엄마 우리 커튼 가지고 놀이동산에 가요!!"

하필 그 타이밍에 돗자리를 가지고 집 앞 공원에 나가자며 아이가 졸랐다.


에효.. 그래.

공원이 한낮의 해가 밀려드는 집보다야 시원하겠지.


아이가 원하는 과일 도시락을 아이가 고른 레고 도시락에 만들었다.

돗자리도 챙겨 현관 앞으로 나갔다.

그런데 신발을 신고 걸을 수가 없었다.

어제 아이와 외출하며 신은 구두가 불편하더라니, 결국 발에 상처가 난 것이었다.

상처부위에 밴드를 붙이고 헐렁한 슬리퍼로 신발도 갈아 신고, 기껏 아이를 데리고 간 곳이라는 게 집 앞 카페였다.



엄마가 발이 너무 아파서 공원까지 걸어갈 수가 없어.
엄마가 여기 카페에 앉아있을 테니까 너는 앞에서 씽씽이 타고 공원은 내일 가자. 응?



시원한 카페에 앉아 창 밖에서 노는 아이를 보다가, 문득 남편에게 무어라 할 처지가 못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가슴으로 아들을 키웠던 그 아저씨와, 밤마다 부모 없는 방에서 홀로 울었던 그 아기가 생각났다.

내가 나이를 먹은 것처럼, 그 아기도 이제는 20대 중반의 성인이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던 어느 밤, 그 녀석이 찾아왔다.

어떻게 사느냐고

결혼할 여자는 있느냐고 물으시는 어른들 앞에서 그 녀석은 다른 건 몰라도 절대 아이는 낳지 않을 거라고 했다.


동거는 해요. 하지만 결혼은 안 할 거예요.

그리고 자식은 절대 안 낳을 거예요.


세상에는 네 친모보다 더 좋은 여자도 많고, 너는 네 친부보다 더 나은 삶을 살면 되지 않느냐 말을 더하려다 입을 다물어 버렸다.


가족을 버린 엄마.

어린 아들 앞에서 죽음을 택한 아버지.

그걸 다 보고 자란 어린 꼬마가 여전히 그 녀석의 가슴에 살아있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 상처를 녀석은 아마도 지금껏 끌어안고 왔나 보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그래, 네가 철이 들었구나. 잘 살아라. 부디 잘 살아라."



하루가 지났다.

여전히 내 sns는 아동학대와 n번방에 관한 이슈로 뜨겁다.

어제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다린 아이는 아침부터 공원으로 산책을 가자며 보챘다.

어제처럼 사과 도시락을 만들고, 마실물과 돗자리를 챙겨 공원에 나왔다.

신나게 엄마를 부르며 킥보드를 타고 바람을 가르는 아이를 보며, 나는 부모 됨을 생각해본다.

내 새끼가 귀한 것처럼, 남의 자식도 귀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아이는 내 소유물이 아님을 잊지 않고, 내 감정의 하수구로 여기지도 말아야겠다고.

몸으로 낳아 가슴으로 인간답게 잘 키우는, 인간다운 부모가 되어야겠다고.


나는 아직도 자식을 낳아야 부모가 되고 어른이 된다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와 정의연 그리고 야만의 시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