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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Jul 15. 2020

잘나지 못해 미안해

독박육아 도치맘 에세이

"네가 잘 됐으면 엄마가 이런 무시는 안 당하는데."


하도 오래된 일이라 이제는 앞뒤 맥락도 기억나지 않음에도, 저 한마디는 아직도 살아 어린 내 가슴을 후벼 판다. 아빠 돌아가신 후 이빨 빠진 호랑이 신세가 된 엄마가 겪는 수모는 전부 하나뿐인 딸자식이 번듯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부당한 일들에 대해 민원을 넣었을 때의 결과가 예전만 못한 것도 아빠가 안 계시고 내가 끗발 있는 인생이 되지 못해서이며, 하다못해 병원에 오래 계신 아빠의 친구분이 겪으신 억울한 일이 시원하게 해결되지 못하는 것도 다 내가 잘나지 못해 도움을 못 드리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평생 갈 인연이라 믿고 의지했던 이에게서 참으로 어이없는 무시를 당하셨다고 했다.

그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으셨다면서, 그 결정이 모두를 위해 옳은 것임을 왜 그리고 강조하고 또 강조하시던지.


"엄마! 그냥 이제는 엄마가 쥐뿔도 없는 신세인걸 알아서 그런 거야!"

그분이 아빠랑 엄마에게 잘 대해줬던 건 그저 살아계실 적 아빠의 능력과 인품과 돈 때문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랬다. 유독 부모님 주변에는 저런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말랑말랑 신앙심에 호소하는, 까고 보면 전부다 헌금이 돈이 필요했던 사람들.

아빠 살아계실 적 문지방이 닳도록 우리 집을 오가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 중, 아빠의 장례에 오지 않은 이들을 나는 기억한다. 아빠가 건재하셨을 때는 그렇게도 굽실거리더니, 막상 돌아가시자 문자 한 통 없었던 인간들.

그래도 잘 사신 인생이셨는지, 가족들이 식사를 따로 챙겨 먹을 틈이 없을 정도로 조문객이 쉴 새 없이 와주셨지만, "누구누구는 꼭 올 건데.."라며 엄마가 기다리던 그들은 오지 않았다.

결국 그렇게 끊어질 인연이었던 것이겠지.

아니, 진작에 끊어질 인연이었던 것이겠지.

또 하나의 인연을 끊어내며 엄마는 며칠을 앓아누우셨다.

속된 말로 그렇게 호구 잡힐 인연이었다면, 오히려 조금이라도 일찍 끊어지는 게 낫다.

그래도 힘들도 아픈 건 힘들고 아픈 거다.


아빠라는 배경이 없는 개인으로서의 삶이 아직도 버거운 엄마와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어차피 듣지도 않을 직언을 쏟아부었다.

엄마. 사람들을 아랫사람 부리듯 하지 마. 더 이상 사람 부리고 살던 시절의 엄마 아니야.

어디 가서 함부로 아는 척하지 마.

이젠 돈 자랑할 것도 없겠지만 있어도 하지 마.

신앙이 어쩌고 말랑말랑한 소리에 제발 귀 좀 팔랑이며 사람 믿지 마.

있어 보이는 감투 쓰고 사명감 넘치는 멋진 여자가 되려고도 하지 마.

그냥 손녀딸 재롱 보시면서 좀 조용히 살자.

내 탓도 하지 마.

그냥 엄마가 인생 잘못 산거야.


오히려 이제라도 알아서 정리된 게 다행인 거야.

나는 아빠 엄마처럼은 안 살아. 돈이 남아돌아도 그렇게는 안 살 거야.


철저하게 나를 방어하고 힘 빠진 엄마에게 잘근잘근 훈계씩이나 해놓고선, 왜 이리 미안하던지.

엄마의 바람처럼 내가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딸이 되었다면, 분명 나는 엄마의 자랑질을 뒷감당하느라 매우 힘들었을 테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한테 미안했다.


그때 그 연구소에서 조금만 더 버텼더라면

그때 그 시험에서 합격했더라면

그때 그 사람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말을 들었더라면

나는 좀 더, 아니 훨씬 더 번듯한 자식이 되었을까.

그래서 부모의 기쁨이 되었을까.

과거 언젠가는 부모의 무한한 자랑이었던 현재의 비루한 딸은, 누구도 지우지 않은 자격지심을 등짝에 짊어지고 오늘도 혼자 헉헉댄다.

엄마의 그 말과 기대가 틀렸다는 건 알지만.

내 딸에게 내 꿈을 투명하면 안 되는 것처럼 엄마도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도 내가 못나서 나는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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