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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Jul 19. 2020

함께라서 좋은 날

아기 엄마의 투병일기

이 병을 앓게 되고
어린아이를 챙기며 암투병을 하면서,
나는 내가 이 사회가 부정하는 잉여인간이 되었다는 좌절감을 느끼곤 했다. 당장 애도 더 못 낳고 돈 벌러 나가지도 못하는, 생산 가치 없는 잉여인간 말이다.
이유는 하나였다.
국가가 예상하는 나이보다 훨씬 젊은 나이에 암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것, 그것뿐이었다.
다행인 것은 나에게는 경제력이 있는 남편과 부모님이 계시고, 예전부터 들어둔 사보험이 있다는 것 정도였달까.
그 외에는 전부 스스로 싸워내야 했던 것들이었다.
나이가 차서 어린이집을 이동해야 하는 우리 집 어린이는 외벌이 외동 가정의 아이라 갈 수 있는 좋은 기관이 없었고, 중증환자를 대상으로 한 보건소의 의료지원도 받을 수 없었다. 나는 독박 육아를 하며 항암치료를 받아야 하는 환자인데, 소득이 있는 젊은 가정이어서 모든 지원에서 배제되었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로 억울하고 슬펐다. 태어난 지 세 돌 밖에 안된 아이는 엄마의 수술을 기점으로 분리불안이 찾아왔는데 말이다.


암밍아웃? 나를 위한 보상?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는 것 따위의 시간은 내게 허락되지 않았다. 보험료로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었지만, 일부는 치료비로 일부는 아이의 협동조합 어린이집 보증금과 보육료로 그리고 나머지는 전셋값에 보태야 했다. 전셋값은 사라지지 않는 돈이라 다행이었고, 그나마 비빌 친정이 있어 버틸만했다.


눈을 감으면 우울해 죽을 것 같아서, 늘 뜬눈으로 유방암환우들 카페에서 밤마다 보초를 섰던 시절이 있었다.
어느 밤엔가, 누군가가 암에 걸린 나를 위로하는 선물로 어떤 걸 하느냐는 글을 올렸다. 누구는 비싼 시계를 누구는 명품 가방을 누구는 해외여행을 스스로에게 선물해줬다는 댓글이 달렸다. 그 댓글들의 끝에 나는 보험이 없어서 당장 치료비도 걱정인데 다들 살만해서 좋겠다는 댓글이 달리고서야 이야기가 멈췄다.

그랬다.
누구는 생계 때문에 회사에 알리지 못하고 항암을 맞으면서도 일을 계속한다고 했고, 누구는 가족들의 성화로 요양병원에서 여러 보조치료를 받으며 지낸다고 했다.
나는 입원 실비가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부탁할 곳이 없어서 요양병원은 꿈도 꾸지 못했다. 나를 위한 선물 같은 걸 하려면 할 수 있었겠지만, 재발과 전이가 잘되는 암이라 이리저리 흩트려 쓰기가 무서웠다.

만약 우리도 좀 살만하게 삶이 안정된 중년의 중산층 가정이었다면, 나도 조금은 덜 궁상맞게 그 시기를 보냈을까. 가끔은 궁금했다.


표준치료가 끝났다.
당장 상속받은 재산들에 대해 세금 낼 돈을 벌기 위해서라도 나는 을 해야 했다. 원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는데, 아이가 다니던 어린이집의 폐원과 코로나 19로 인한 가정보육으로 공부계획 같은 건 안드로메다로 사라진 지 오래다. 아이를 기관에 보내 놓고 바로 옆에 있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인생 참, 그렇다.
일자리를 구하자니 불경기고,
치료 마치고 나니

나는 애매한 나이에 애까지 딸린,
쓸데없이 공부만 많이 한,
암 치료를 방금 마친 아줌마다.

모임에 갔다가 하는 일 없이 선물만 또 받아왔다.


개인정보라는 게 강아지 사료보다도 못한 금액에 사고 팔린다던데, 내가 암환자라는 정보는 팔리지도 않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보험에 들라는 전화가 들어온다. 기다리는 연락이 있는지라, 그런 전화를 받으면 그렇게 김이 빠지곤 한다.
그날도 어김없이 보험에 가입하라는 텔레마케팅 전화를 받았다.
“귀한 시간 더 뺏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암환자이고 산정특례가 끝나지 않아 보험을 들지 못합니다. 죄송합니다.”
상대의 말을 가로채 내 말을 전했다.
서둘러 끊으려는 내게 수화기 건너편에서 말을 건넸다.
“저도 7년 전에 폐암 수술을 받았어요. 지금은 이렇게 일도 해요. 완치하실 거예요. 기도할게요.”
그렇게 전화가 끊어졌다.

그 일이 계속 머릿속에 남아있는 요즘이다.
목소리를 들으니 연세가 있으시던데.
폐암 경험자가 왜 콜센터에.
일을 해야 하셨던 걸까 일이 하고 싶으셨던 걸까.



다시봐도 인생사진이다


오랜만에 젊유애 (젊은 유방암 애프터케어) 모임이 있어 서울에 다녀왔다.

우연히 블로그를 통해 유방암 환우의 프로필 사진을 찍어주고 단체의 홍보에도 사용한다는 글을 본 게 인연의 시작이었다. 전신 항암을 마치고 표적 항암 중이라 머리가 제멋대로 나고 있던 여름날,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었다.


젊유애라고 했다. 젊은 유방암 애프터케어.
부산에서 치료를 받는 젊은 환우가 만든 단체였다.
나 혼자 죽도록 외롭고 힘들고 구질구질하게 버텨냈던 그 시기의 고민을, 그도 비슷하게 하고 있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다면 기꺼이 돕겠다 한 게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말만 그렇게 해 놓고 1년이 지났다.
앞장서서 행동하는 대표와 나와 비슷한 유방암 경험자들을 만나는 자리가 있었다. 서로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바라는 정책과 사업방향들을 제안했던, 두고두고 여운이 많이 남는 시간이었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은 젊은 인생들이어서, 나눌 이야기들이 많이 있었다.



같은 병을 앓는 어느 20대 청년은 혼자 벌어 생활을 해야 하는 처지라고 한다. 당장 일을 해야만 하는데 덜컥 암에 걸렸다. 그것도 5년간 가장 치료가 힘들다는 삼중음성. 약제가 보험처리가 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비보험으로 넘어가면 기천만원은 우습게 깨진다. 그런데 그 환우에게는 사보험이 없다고 했다. 당장 치료비도 걱정이고, 생활비도 걱정인데, 만약 치료하느라 경력이 단절되면 나중에 재취업은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됐다.

이 청년에게 있어 주변에 자신이 암환자임을 밝히는 일은 그리 말랑한 것이 아닐 테다.


나는 두 번의 암밍아웃을 했다.
처음은 동네 사람들에게 남는 반찬 있으면 우리 집에 좀 나눠주고, 내가 혹여 많이 힘들면 우리 집 어린이 좀 돌봐달라는 부탁의 목적이었다. 어떤 이들은 주변의 안쓰러워하는 시선이 싫어서 밝히지 않았다고 하던데,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두 번째는 아빠가 마지막으로 계시던 중환자실 앞에서였다. 연명치료를 중단하겠다는 의료진에게 상주 노릇 해야 할 무남독녀 외동딸이 암환자라고, 그러니 최소한 치료 하나가 끝날 때까지만 좀 봐주시면 안 되겠느냐고 사정을 이야기해야 했었다. 왜 중환자실 면회를 들어가면서도 털모자를 쓰고 다녔는지를 설명해야만 했던 그 순간이 나는 아직도 가슴이 메이고 아프다.

어쩌면 이제는 세 번째 암밍아웃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뭐라도 을 하려면 지난 3년여의 시간을 소명해야 할 테니까. 항암 중에 아이를 안심하고 보낼 새 어린이집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그때 느꼈던, 어린아이와  둘이 칼바람 부는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같았던  두려움을 느끼게 될까 봐 겁이 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던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 했던가.

비슷한 고민과 상처와 어려움을 겪었고 겪고 있는 이들과 함께 앞날을 이야기하니 그나마 두려움이 사라졌다.

젊은 암환자들이 큰 걱정 없이 치료 잘 받고 다시 사회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나도 내 아이도, 나처럼 독박 육아하며 암투병을 해야 하는 처지의 엄마도, 인생 독고다이인 그 젊은 청년도 넓고 좋은 길 걸을 날이 오겠지.

부디 내 글과 마음도 그 길을 돕는 작은 손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아직 갈길은 멀지만.


함께라서 참 좋은,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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