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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Sep 17. 2020

사노비남편의 블로거 입문을 도와주다가 반성을 했지 뭐야

탑골가요

한동안 남편에게 블로그 세계에 들어올 것을 권했던 시절이 있었다.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한다며 계속 듣지를 않던 남편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블로그를 해야겠다는 것이 아닌가.

시작은, 외식을 하러 나갈 때마다 sns에 음식점 사진을 올리면 음료수를 준다는 콜라만큼 달달하고 톡톡 입에 감기는 제안이었다. 업로드 한 후로 잊고 있었는데 대체 왜 모르는 사람들이 자꾸 좋아요를 누르냐고 묻더니만, 느닷없이 인스타와 블로그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너도 할 수 있다며 제안했던 내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나 보다. 결실까지는 너무 앞서갔지만, 그래도 시작이 반이라며 남편의 어깨를 다독여줬다.



남편의 블로그는 "사노비"가 컨셉이다.

공노비 사노비 대가댁 머슴.. 뭐 이런 거 말이다.

머슴과 노비가 무슨 차이냐 싶겠지만, 그래도 머슴이 노비보다는 신분이 좋았다. 그랬다고 한다.

저녁을 먹고 한동안 같이 앉아 카테고리 등 고민을 했다. 컨셉은 어떻게 잡을 건지, 블로그 이름은 뭘로 할 건지, 닉네임은 어떻게 할 건지.

지금은 코로나 19로 인해 못 가고 있지만, 또래 아이가 있는 지인과 함께 종종 아이들만 데리고 아빠들끼리 여행을 다녀왔던지라 여행 폴더도 넣을 생각인 듯하다. 여행 폴더 이름을 고민하던 남편에게 "내 딸만큼은 귀한 댁 아씨로 키우고파" 뭐 이런 걸로 하라고 농담을 던진 밤이었다. 대략 블로그의 컨셉과 분위기가 드라마 추노를 연상시켰다. 추노는 남편의 군대 후임이라는 장혁 씨가 대길이로 나왔었던 2010년작 드라마다. 남편의 말에 의하면 장혁 씨랑 담배같이 피우던 사이라던데 연락처도 없고, 장혁 씨가 소속되어 있는 싸이더스에서 매니저 생활을 잠깐 하다 나왔다는데, 만약 이 사람이 계속 그 일을 했다면 우리 인연을 어떻게 되었을까.

여하튼. 남편과 배우 장혁에 관한 이야기 중 확실한 것은 딱 하나다. 잘생긴 사람 옆에 오징어.

군 시절에 찍은 사진이 있던데, 잘생긴 사람 옆에 오징어 혹은 잘생긴 사람 옆에 오징어 그 옆에 또 오징어였다. (이건 본인 스스로도 인정함)



느닷없이 의식의 흐름이 추노로 빠져버렸다.

나는 그런 기능을 쓰지 않지만, 가끔 블로그에 들어가면 아직 음악을 들을 수 있게 설정되어 있는 곳들이 있는 게 생각이 났다.

그래서 반쯤 농담으로 bgm을 권해봤다.

넣어보라고. 아주 적당한 음악을 안다고.


응. 바로 이거.


초반부터 리드미컬하게 치며 달려가는 북소리가 마치 사람의 심장소리 같고, 이 나이 먹고 보니 가사가 처절하게 진짜라서 강력하게 추천을 하다가, 나 혼자 새벽 동이 틀 때까지  MC Sniper의 곡을 들을 줄은 정말 몰랐다.


오 오오오오오 오 오 오오오오오 오
쫓고 쫓기는 게 우리 인생
개만도 못한 것이 노비의 생
사는 것이 전쟁 민초의 희생
내 삶은 날개가 부러진 새
-MC Sniper 민초의 난 가사 일부

(근데 이거 예전에 엘지 트윈스 조인성 선수 응원가였는데)



힙합을 중독된 듯 듣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이야 차분한 게 좋다며 클래식과 테제 음악 을 즐겨 듣지만, 20대의 나는 힙합과 신해철에 열광했던 학생이었다. 마왕이 대학교 축제 때 와서 강연을 한다고, 수업을 자체 휴강시켜버리고 대강당에 줄 서서 들어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신해철의 장르가 힙합이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그때 신해철의 음악만큼이나 즐겨 들었던 가수가 바로  MC Sniper였다.


Gloomy sunday, 봄이여 오라, better than yesterday ...

마이마이를 쓰던 시절에는 터보

CD플레이어를 듣던 시절에는 김동률과 패닉

집 밖으로 나오면 mp3가 지갑만큼이나 가장 중요했던 내 대학생 시절의 절반은 MC sniper와 해철 옹이 있었다.

낮에는 힙합 음악을 듣고, 밤에는 남궁연과 신해철의 라디오를 들었던 그 시절에는 말이다.

언젠가 남궁연의 고릴라디오에서 pink martini를 알게 되고, 아이팟이라는 신문물을 만나게 된 후로 한동안 잊고 살았지만 말이다.  

한동안 잊고 살았다.

그랬다.

그 후로는 에피톤 프로젝트와 브로콜리 너마저 그리고 소녀시대에 미쳐 살았었고, 남편을 만나기 전후로는 야구에 환장을 했으며, 아이를 낳은 후로 한동안은 뽀로로와 핑크퐁에 빠져 살았다.



물론 지금도 아이가 보는 핑크퐁 채널의 대부분을 흥얼거리고 바다탐험대 옥토넛 주제가를 실감 나게 불러대는 엄마이지만, 나도 한때는 이 노래를 노래방에서 숨넘어가게 불러대던 꽃다운 청춘이었다.

하늘은 언제나 나의 편.

영혼을 팔아 너에게 갈 정도로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이 없어서 그리 공감은 못했다만, 노래가 멋있어서 미친 듯 불렀던 그 노래.


이걸 듣고 나니 유튜브가 다음 곡으로 better than yesterday를 보여줬다.

아!

'맞아. 스웨그란건 이런 거지!'

침대에 누워 허벅지를 탁 쳤다.




요즘 힙합에 적응을 못하겠는 나는, 여전히 10년도 더 지난 이 사람의 힙합이 좋다.

뭐 되게 번쩍번쩍 휘황찬란하게 하고 나와 스웩~ 플렉~ㅅ 를 하지 않아도, 내 눈엔 이게 진짜 멋지고 진짜 자유로우며 한껏 지른 것 같다. 이런 나를 보고 누군가는 "라테 타임 충만한 젊은 꼰대 아줌마"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렇다.

서로 저격을 한다며 한껏 멋을 부린 폼으로 외국인 흉내를 내는 게 왜 멋있는지도 모르겠고, 오히려 서구 중심주의적 사고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근원을 따라 따져보자면 그들의 저항의식은 어디로 갔을까. 음주운전 사고를 내고 운전자를 바꿔치기를 했다는 힙합가수의 모습이 힙 한 거라면, 나는 그런 힙합은 싫을 것 같다.

모르겠다. 이 모든 생각이 전부 내가 애 키우고 사느라 시대에 뒤떨어져서 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2002년에 나온 힙합이 2020년에 들어도 멋지다는 건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시간이 지나긴 지났나 보다.

스나이퍼 오빠가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줄 나이가 되었다는 게 말이다.

세상은 변했고, 그의 날카로운 화살 같던 랩은 깊고 큰 눈을 가진 부처 같아졌다.

아이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생각이 나서 만들었다는 펭귄을 듣다가, 20대 시절부터 써댔던 내 글들을 떠올렸다.

스무 살이 되어 교회 청년부에 올라가자마자 교회 소식지에 글을 썼다. 정기적으로 내 글이 들어가는 칼럼란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런 짓을 뭐하러 했을까 싶기도 하지만, 그때의 교회는 내 세계관의 전부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내 글에는 항상 뒷말이 많았다.

언젠가는, 교회 안에서 백날 천날 끼리끼리 모여 묵상만 하고 있으니 머리에 들은 것만 많고 생각은 제자리걸음인 큰 머리 외계인 같은 존재가 되는 거라고 썼다가 호되게 욕을 얻어먹기도 했다. 지금도 생생하다. 편집자 언니는 늘 글을 조금이라도 유하게 편집을 하려 했고, 나는 글의 느낌이 죽는다며 매번 날을 세워 싸웠다. 그런 아이였다.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을 가장 날카로운 말로 하나하나 써서 잘근잘근 씹고 깔끔하게 결론을 내야 직성이 풀렸던, 그런 교회 언니였다.


몇 달 전, 글 쓰는 작업을 그만둘까 진지하게 고민했던 때가 있었다. 세상에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고, 나 같은 사람은 언제 빛을 볼 수 있을지 자신도 없어서 한참 의기소침해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책 리뷰만 집중해서 올렸다.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 포기하게 될 것 같아서, 중독된 듯 활자에 집착했다.

그날도 아이 어린이집 앞 카페에서 책을 보다가 우연히 예전에 같이 일을 했던 이와 연락이 닿았다. 요즘 이러한 책을 보고 있는데, 우리 함께 힘들었을 때가 떠오르며 다시 한번 생각이 났다는 내 말에 그가 달려왔다.

그는 아이를 낳고 직장을 포기한 전업주부였다. 아이들을 키우다가 우연한 기회를 만나 작은 시민사회단체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 경력이 이어져 그는 현재 시의회 의원이다. 의원이 되기 전부터 꾸준히 글을 읽고 기고하던 삶을 살던 그녀는 내 글에 숨겨진 심리를 정확히 보고 있었다.

날카롭고 톡톡 튀는 글.

부드럽고 대중적인 글이 되고 싶고, 비판받고 싶지 않아 최대한의 방어를 갖추지만 결국에는 날카롭고 톡톡 튀는 글 말이다.

내 글에는 대중성이 없는 것 같다고, 희망이 없는 것 같아서 고민이라던 나에게 그가 해 준 조언은 한 7년만  마음먹고 더 해보라는 것이었다.



앞으로 7년.

엠씨스나이퍼와 고 신해철의 곡은 20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여전히 멋지도 세련되다. 내 부족하고 비루한 글은 그에 비할 바가 못되지만, 적어도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세련되고 날카로움이 살아있는 글이 되길 바랐다.



날을 갈아 거침없이 칼을 뽑아
다가오는적을 향해 목을 베고 확실하게 숨을 끊어라!
내 적이라면 칼을 맞대 형제라면 살을 맞대
너 아니면 내가 죽고 나 아니면 네가 죽는
빌어먹을 전쟁은 파도와도 같아
박차고 일어나서 갈 데까지 가는 거야
떠나려면 떠나가라 있는 힘껏 밀어붙여
머리부터 뼛속까지 계속해서 소리 질러 아!
-better than yesterday 가사 일부


칼의 날을 갈아 다가오는 적을 향해 목을 베고 확실하게 숨을 끊으라며 안으로나 밖으로나 날이 바짝 선 회칼 같은 랩을 하던 가수가, 하늘을 날고 싶었던 펭귄에게 너는 바다를 날 수 있다며 깊이와 무게가 중식도 같은 랩을 하는 날이 오는 것처럼 말이다.


skyfall -mc sniper (feat. 소낙별) 캡처


하지만 그런 날이 과연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개혁성을 잃어버린 개신교가 무슨 의미이냐 비판하고, 쌍용자동차 노사분쟁이 어째서 억울하고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캐고 다녔던, 심장이 불처럼 타오르던 젊은이는 이제 없다. 이 밤에 노트북 앞에 앉아있는 나는, 현재가 캄캄하고 앞날이 걱정되는 어정쩡한 대가댁 사노비인지 머슴인지의 아내일 뿐이다.

내 코가 석자라 세상 돌아가는 일에 귀를 닫아버린 지 오래고, 언제부턴가는 일단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도 가지게 됐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길거리에 뛰쳐나가 외치던 청춘은 어디로 갔을까.

그럼에도 글에 대한 욕심은 차고 넘쳐서 이 밤에 이러고 앉아 있는 욕심 덩어리다.

남편은 블로그를 철저히 수익형으로 운영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에 뒤처질까 부지런히 달릴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한 끝이 궁금하다.

과연 나는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이 될까.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작 이런 것뿐이라. 기억하고 기록하고 다시 끄집어내는 것


1년 전에 나왔다는 힙합을 이제야 들으며 이 밤에 울고 앉아있는 나는 과연 나 스스로 가치 있다 평가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남편의 블로그 입문을 도와주다가 밤새도록 나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해버렸다.



상지 | 商摯
*mail | piaounhui@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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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ntc_books : 글쓰기 북리뷰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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