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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Nov 28. 2020

나는 엄마처럼 살기 싫은데

독박육아 도치맘 에세이

"우리 엄마? 말도 마."


친구와 부모님의 근황을 나누던 중이었다.

내 이야기를 듣던 친구가 당뇨와 고지혈에 좋다는 방법들을 이야기해 주자 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엄마는 알려드려도 어차피 안 한다고.

그랬다.

관절이 안 좋으니 요양보호사님이 계신 시간에 수영이라도 다니시라고 권해도 엄마는 절대 가지 않으셨다. 바쁜 게 가장 큰 이유였고, 마음에 드는 수영복이 없는 게 두 번째 이유였으며, 사람들 앞에 수영복을 입고 나서는 게 부끄러운 게 세 번째 이유였다. 그래서 엄마는 운동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 시간에 요양보호사님을 붙잡고 전도를 하셨다.

어디 수영뿐이랴.

고지혈이 있으신 분이 젓갈은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어차피 우리는 김치를 그리 많이 먹지 않는 데다, 필요하면 사다 먹어도 되니 김치 좀 보내지 마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소용이 없다. 엄마가 좋아하는 젓갈에 버무린 음식은 철마다 새로 만들어지고 전부 우리 집으로 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티브이를 보고 당뇨환자에게 좋다는 무슨 수입품 설탕 같은 거 사다 드실 생각하지 마시고 식단부터 고쳐야 한다고 백날 천날 말씀드려도 소용이 없다. 결국엔 드시는 양의 강도만 높아지고 있을 뿐, 통화를 할 때마다 엄마의 앓는 소리는 날로 늘어나고 있다. 이젠 엄마의 한숨소리만 들으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며칠 전에는 밥솥을 샀다.

밥의 당질을 35%가량 저감시킨다는 밥솥이다.

현미를 드시면 속이 쓰려서 꼭 백미를 드셔야 한다는 우리 집 당뇨환자 어르신을 위한 것이었다. 입맛이 없다고 국에 백미 밥으로 후루룩 드시니 당연히 당은 피크를 찍을 테고, 당연히 몸은 더 아프고, 당연히 약은 더 독한 걸로 처방을 받으셔야 했을 테다. 보다 못해 당뇨환자를 위한 밀키트를 주문해 드리겠다 했지만 거절당했다. 사다 드리면 분명 냉동고에서 화석이 되어 발견될 것 을 알기에 밥솥을 구입했던 것이었다.

일단 밥에서 당을 조금이라도 줄이고, 많이 씹어 드시라고 귀에 딱지가 않도록 잔소리를 했다.  

말기 암에 걸린 환우들 중에서 식이요법을 통해 암을 이겨낸 분들이 있다. 그분들의 방법을 내 나름 요약을 해보면 영양적 가치가 높은 다양한 영양소와 식재료를 되도록 오래 씹어 섭취해 혈당을 올리지 않으면서도 몸에서 최대한 영양소를 흡수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걸 한 시간 가까이 설명을 해드렸다.

"엄마, 음식을 적어도 한 숟갈에 100번은 씹어봐."

그렇게 이게 침인지 밥인지 알 수 없을 정도까지 씹어서 삼켜야 한대.

그 사람들은 선식도 100번 넘게 씹어서 삼킨대. 대충 삼켜도 목에 걸리지도 않을 선식을.

나는 애 먹일 때야 겨우 챙겨 먹는 신세라 시도도 못하지만, 엄마는 할 수 있잖아.

하지만 엄마는 오래 씹어 드시기는커녕, 당이 빠진 밥이 너무 맛이 없다며 곡기를 끊어버리셨다.   

대신 엄마 생각에 이 정도면 되겠다 싶은 군것질을 하신다고 한다.

결국 밥솥은 마음의 안정과 딸사위 자랑용이 된 듯하다.



남편의 회사에 확진자가 나왔다.

아침부터 병원에 가서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세 식구가 집에 콕 처박혀 하루를 보냈다.

사위가 코로나 검사를 받았다는 말에 엄마는 또다시 분주해졌다.

오후에 잠깐 가서 문 앞에 먹을 거 걸어놓고 갈 테니 그리 알라는 전화가 들어왔다.  

진짜 크고 좋은 조기 새끼를 가져다줄 테니 저녁에 먹으라고.

김치 더 가져다줄 테니 집에 있는 건 버리고 새 거 먹으라고.

손녀딸 겨울에 감기 걸리지 말라고 하동에서 대봉감을 올렸으니 잔말 말고 받아 먹이라고.

...

김치에서 혈압이 상승했고, 대봉감에 폭발했다.

더 이상 쓸 약이 없을 정도로 악화된 당뇨환자가 대봉감이라니.

손녀딸의 겨울 감기는 사실 핑계다.

엄마는 매년 가을마다 꼭 하동에서 대봉감을 올려서 쟁여놓고 드셨다. 나에게도 그걸 꼭 먹어야 한다며 감당을 못 할 정도로 보내셔서 나는 매년 감을 내다 버린다.

 

"엄마는 대체 왜 그래? 생각이 있어?"


전화 통화를 하거나 만날 때마다 아프고 힘들지만 엄마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 하시지만, 사실 엄마가 알아서 하시는 일은 병원에 스스로 다니시는 것 말고는 없다. 온갖 이유와 핑계로 고치셔야 하는 건 하지 않고, 엄마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사신다. 아빠가 계실 때는 아빠를 온종일 케어하느라 힘들고 바빠서 어쩔 수 없다고 나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아빠가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남으시니, 모든 게 명확하게 보인다. 그냥 엄마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 말이다.



엄마.

우리 엄마는 자기 확신이 참 강한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크고 주장도 강해서 어디에서든 대장을 해야만 하는 분이셨다. 그래서 늘 바빴고 챙겨야 하는 사람들이 늘 많았다. 당신의 판단이 옳다 믿어 의심치 않고, 당신의 정서적 만족이 가장 중요하며, 남에게 베푸는 대로 나에게 돌아온다는 믿음을 가지고 여러 사람을 챙기셨다. 엄마의 하루는 늘 바빴다. 하루 종일 아빠를 케어하면서, 딸내미도 키우고, 한동안은 죽은 시동생의 아들과 이혼하고 온 친정 조카까지 거뒀으며, 교회의 직분은 말도 못 하게 많았다. 그 덕에 어디에서든 엄마는 "참 훌륭한 부인" 이었다.


그래서 나는 힘들었다.

그런 엄마 아래에서 자라는 게 너무나 힘들었다.

엄마는 내가 특목고에 다니는 게 자랑이라면서도 그 흔한 총명탕 한 번을 해주시지 않았다.

제발 한 번만 한의원에 가서 제대로 맥 짚고 한약 좀 지어달라고 졸랐지만, 사촌동생이 치고 다니는 사고를 뒷수습하느라 늘 바빴던 엄마는 나에게 포도 즙과 홍삼액기스만 열심히 챙겨주셨다. 포도 즙과 홍삼 그리고 아침저녁 라이드, 수험생 딸을 둔 엄마의 낭만과 자기만족이었으며, 바쁜 엄마로서는 그게 최선이라고 했다.

수능을 치르고서야 갔던 한의원에서 내 체질에는 포도 즙과 홍삼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어쩐지 죽도록 졸리더라니.

어디 이것뿐이랴.

나는 일곱 살에 안경을 썼다.

얼굴의 절반 크기인 금테 안경이었다. 어릴 때야 엄마가 쓰라고 하니 썼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이용 안경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일반 안경테에서 가장 작게 나온 사이즈의 안경, 그것도 무거운 금테였다. 너무 무거워서 귓바퀴에 피딱지가 앉았었다. 그래서 일곱 살의 나는 늘 울면서 안경을 쓰고 있었다.

얼마 전 우리 집 여섯 살 어린이가 안경을 쓰게 됐다.

세상이 좋아져서 어린이용 안경도 나온다는 내 말을 듣던 친구가 말했다. 우리가 어릴 때에도 어린이 안경이 있었다고. 친구의 동생은 남대문시장에서 압축한 렌즈를 넣은 어린이용 안경을 썼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엄마는, 그래도 그 시절 안양 1번가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안경이었다고 하셨다.

비싸고 좋은 안경이니 너무 억울해 하지 말라고.  

아,비싸고 좋은 안경.

그래서인지 내 안경테는 늘 비쌌다. 시력검사를 해주는 안경점에서 권하는 대로 구입을 했으니 더욱 그러했을 테다. 게다가 나는 시력이 좋지 않다는데 늘 안과 아닌 안경점에서 시력검사를 받았다. 그 이유라는걸 이제야 여쭸더니 이유가 참 명쾌하다.

안과로 유명한 병원까지 가는 길이 멀고, 그 병원의 시스템이 엄마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이 말을 들은 후로, 딸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안과를 다닐 때마다 생각한다.

'차가 르망 살롱이었으면 뭐 하나.'


르망 살롱.

그 시절에 르망 살롱을 탔다는 게 엄마의 자랑 중 하나였다.  

생각할수록 헛웃음만 나올 뿐.

이렇게 분노와 울분의 생각들이 쌓이고 쌓여 결론이라는 게 났다.

그러니까 나는 자기만족과 자랑이 중요한 엄마 아래에서 엄마의 기준대로 자란 것이다.

"정말 자라느라 고생 많았다 너."

스스로를 토닥이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나는 엄마처럼 자식을 키우지 않겠다고.

나는 엄마처럼 자식과 남편에게 기대하고 살지 않겠다고.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난리를 했는데도 엄마는 우리 집 앞에 다녀가셨다.

정말 내가 속이 터져 죽는 게 엄마의 소원인가 구시렁대며 냉동실 어딘가에 처박힌 대봉 홍시감을 찾기 시작했다. 새로 온 감을 창 앞에 둬서 홍시로 만들어 먹고, 그러고도 남으면 냉동실에 얼리는 게 내 가을 일과 중 하나다. 그 사이 상한 감들은 전부 버려야 하고. 그러니 새로 올 감을 들일 자리를 만들어야 했다.

가뜩이나 날도 추운데 냉동실 앞에 앉아서 이러고 있어야 하나.

사실 친정집 앞에도 대봉감 나무가 있는데, 왜 굳이 감을 더 사서 올리시는지 나는 아직도 알다가도 모르겠다.

"대체 엄마는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

짜증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냉동실을 활짝 열고 앉아 발굴 작업을 하다가 순간 손이 멈췄다.

암 수술을 앞두고 급하게 사다 쟁여놓은 무가당 선식이 나온 것이다.


무가당 선식.

나와 같은 암을 겪은 지인이 내게 추천해 준 암 환자 추천식이었다. 식이요법으로 자연치유를 하는 환우들이 챙겨 먹는 거라며, 그걸 요거트에 뻑뻑하게 풀어 견과류를 좀 넣고 300번 씹어 먹겠다고 의미심장하게 사다 놓은 것이었다.

암 수술을 받고 집에 돌아오면 아침마다 그렇게 챙겨 먹으리라 호언장담을 했던 게 생각이 났다.

한 번은 먹었다.

너무 맛이 없어서 더 이상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양심에 찔려서 몇 번은 더 먹었었다.

그러다 항암을 시작하면서 아예 기억 속에서 잊어버렸다.

그때는 된장국도 겨우 끓여 먹었으니까. 아무것도 못 먹겠으면 아빠가 드셨던 뉴케어만 먹으며 버텼으니까.

"아, 내가 이걸 잊고 있었구나."

지금이라도 먹어볼까 싶어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남편과 애 밥 차려 먹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팔자에 무슨.

아침에 아이를 깨워 간단히 먹여 어린이집에 보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다. 어린이집이라도 보내면 다행이다. 요즘처럼 가정 보육을 하는 기간이면 사람답게 밥을 먹을 시간조차 없어진다. 아이에게 엄마는 같이 빨리 밥을 먹고 나와 놀아줘야 하는 대상이니까. 게다가 느닷없이 오늘부터 남편은 재택근무네.

블라블라 블라블라... 아이고 내 팔자야.

이런저런 생각이 파도를 타다가 문득, 내 모습이 엄마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남편 챙겨야 하고 자식을 키워야 하고, 내 상황은 이렇고, 그래서 나는 할 수 없다며 포기하는 것이 늘어나고 있다.  

그래서 엄마한테 그토록 짜증이 났던 것일까.

그리고 엄마는 당신이 그렇게 살았기에 그토록 나에게 건강과 가족을 이유로 주저앉고 포기하고 가만히 집에 있으라 하시는 걸까.

...



남편과 아이의 틈바구니, 그 잠깐 사이에 커피 한 잔을 꼭 마셔야만 하는 나를 본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물을 많이 마시라는데, 나는 물은 안마셔도 뜨거운 아메리카노는 꼭 챙겨 마시는 사람이다.

당뇨가 있으면서 믹스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던 엄마와 나는 뭐가 다른가.


엄마처럼 살기 싫고 엄마처럼 나이 들기 싫다면서 결국 나는 작은 습관 하나하나 엄마를 닮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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