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상지 Jan 24. 2021

둘째는 안 낳을거냐는 그 흔한 인사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가부장제는

"둘째 낳아야지. 딸만 하나 있으면  . 둘째는 아들 낳음 좋겠다."


시부모님댁에서 가까이 사시며 왕래가 잦았던  외가 어른이 돌아가셨다. 시어머니의 형제라, 어찌 보면 나와는 관계가 없는 분이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생전에    적이 있어서 남편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조문을 갔다. 오랜  투병 끝에 떠나셨다.  역시 항암을 하며 그분의 안부를 걱정하곤 했는지라,   같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다.
오랜만에 장례식장에서 다시 뵙게  시어머니는 얼굴이  많이 수척해지셨다. 힘든데 어찌 왔느냐 물으시며, 아픈 사람이 오래 있을 곳이 못된다며 어서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라 하셨다. 물론 다른  외가 어른들은 며느리가 장례 자리를 지키지 않고 어디를 가느냐 묻긴 했지만.

조문의 인사를 남기고 나가려다가 남편의 외사촌 누나와 마주쳤다.
그러고는 이런 인사의 말을 들었다.
둘째는  낳느냐고.
딸이 있으니 둘째는 아들을 낳으라고.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둘째가  인생에 있다면 아들을 낳고 싶긴 했다. 하지만 내게는 아들 대신 암이 찾아왔다.

사촌 누이의 말을 듣던 남편이 대화를 가로챘다.

"에이, 요즘 하나 키우기도 벅차요 누나."
...
그냥 제 안사람이 아직 암 투병 중이라 둘째 계획은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깔끔하게 대화가 정리될 것을, 남편은 공연히 다른 핑계로 둘러댔다. 그렇게 서로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마무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도는 실패했다.
"야, 네 동생이 애 넷은 낳을 거라고 하니까 너네가 하나 입양해서 키워라."

그냥 인사를 하고 나오는 내게 남편은 내게 누이가 인사를 좀 짓궂게 한 거라며 애써 둘러대느라 바빴다.
자기 아버지처럼 암을 겪고 있는 이에게 둘째는 낳지 않을 거냐는 말이 인사가 되는 건 어느 지역의 상식일까.
문득 이 남자의 집안에서 며느리인 나의 존재는 대체 어디쯤일까 의문이 들었다.
아프거나 말거나 애는 더 낳아야 하는 존재인가.
애를 낳기 위해서만 결혼을 한건 아닌데 말이다.


며칠 전, 남편이 해외로 원정 성매매를 다녀온 후 자신에게 성병을 옮겼다는 사실에 분노한 아내가 시어머니를 폭행한 사건을 접했다. 아흔에 가까운 연세의 시어머니의 머리채를 붙잡고 흔들며 남편에게 무릎을 꿇고 사과하라고 했다는데, 며느리에게 징역형에 집행유예가 선고되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감히 시어머니를 폭행했는데 집행유예라며 나라의 법치가 흔들린다는 의견, 그리고  그간 시집 식구들과 남편에게 당한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했다는데 그런 사정을 감안하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라는 주장이 팽팽하게 대립했다.
나는, 왜 남편의 머리채를 잡지 않았을지에 대해 생각해 봤다. 잘못한 건 남편인데 말이다. (자신보다 힘이 셀 남편을 상대하느니 약한 노인에게 분풀이를 하는 게 낫다 여겼을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가 나에게 손절한 그분의 아들이 그 모양이라 속이 터지기는 했겠지만, 어쨌든 잘못한 건 남편이지 않나. 설령 그간 결혼생활을 유지해오면서 시어머니와 그 가족들에게 쌓인 분노가 극심했다 해도 말이다. 혼자 생각의 나래를 펼치다가, 문득 며느로서의 위치는 결국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지점에 닿았다. 아들 가진 유세가 대단했던 시절이었던걸 감안하고서라도 그 시집살이를 모두 감내하고 살았다면, 그 가족들에게 그 며느리는 그게 당연한 사람이 되는 것이니 말이다. 뉴스 속 그 며느리는, 평생 혼자 끙끙 속에 싸매고 있다가 종국엔 혼자 범죄가가 된 꼴이다.


그러고 보면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모든 관계에는 적당한 거리라는 게 있는 것 같다.
착하고 순종적인 며느리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부여된 가치관에 끼어 맞추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이의를 제기하면 그저 잠깐 '반기'를 드는 반항의 시기쯤으로 여겨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결국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이 첫 단추가 참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함께 사는 장인을 폭행해 사망에 이르게 한 사위에게 구속영장이 기각되는 나라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여자로 며느리로 조금이라도 사람다운 포지션을 확보하려면 무언가 시기에 맞는 발버둥이 필요하다.


신혼이었다.
시아버지와의 갈등으로 집안이 난리였다는 사실은 이미 시고모님들까지 모두 알고 계신 일이었다. 그러던 중, 막내 고모님의 며느리가 세상을 떠났다. 자살이었다는 것도 나중에서야 남편에게 집요하게 캐물어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그분이, 무슨 이유로 어린아이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는지조차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게 영문도 모른채 빈소를 찾아 조문을 했다. 그랬다. 이 남자가 보고 자란 며느리의 미덕이란 그런 것이었다. 그냥 조용히 따라오는 존재 말이다.

오랜만에 뵙는 고모님께 그동안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말씀을 건넸다. 뭐라 듣기 안좋은 말씀을 하셔도 다 들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심려가 크시느냐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모님이 내 손을 잡고 이렇게 말씀 하셨다.
"괜찮다. 우리는 아무래도 괜찮다. 너희만 잘 살면 되는 거다."
그간 내가 만나 뵌 고모님이었다면, 경상도 내륙의 보수적인 지역에서 나고 자란 반가 여식이자 양반가의 며느리인 이 분이라면, 아무리 그래도 시어른께 그러면 안 되는 거라 하셨을 텐데 말이다. 그 순간 고모님의 말씀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모든 순간이 다 이렇게 아련하지만은 않았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시고모님들은 내가 남편을 부추겨 상속 분쟁을 일으킬 거라 염려하셨다. 오히려 나는 어머니께 다 드리고 나중에 어머니마저도 가시면 그때 아들 둘이 나누는 게 나을 것 같다 조언한 입장이었는데 말이다. 나중에서야 남편을 통해 어른들이 그런 걱정을 하셨더라는 말을 듣고 생각했다.

고모님들이 드라마를 너무 많이 보셨다고.
그래도 나는 초장에 포지션을 확실하게 잡아서 참 다행이라고.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인식이라는 건 있는 것 같다고.





친척들과의 거리에 대해, 항암을 하며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내내 생각했다.

며느리는 과연 가족인가.

내가 암투병을 하던 당시, 시동생이 결혼을 한다 하여 온 집안이 축제였다. 그러나 아팠던 나는 상견례부터 모두 열외였다. 하다못해 동서 될 사람을 수술 전에 만나게 자리를 마련하라는 내 요구는 어디로 전달되다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가족의 끈끈한 정으로 서로 모이지 못해 죽고 못 사는 일가친척들이라던데, 내가 어린아이를 두고 암에 걸려 항암투병을 하는 동안 아이의 안부를 물어본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내 안부를 물어봐 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자손이 밥은 잘 얻어먹고 다니는지는 물어봐 줘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싶어 한동안 화가 났었다.

"야, 남한테 뭘 바라냐? 그래도 네 딸한테 명절에 봤다고 용돈도 주는 남이 어디있냐. 좋게 생각해."

친구의 이런 대답을 들으며 수긍을 할 정도로, 분노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며 많이 희석되어갔다.

표준 항암치료를 마치고, 우연히 아이를 데리고 예쁜 사진을 찍게 되었다. 염치 좋게도 오랜만에 고모님들께 아이 사진을 문자로 전송했다.
아이가 이만큼이나 컸다고. 그간 연락을 못 드렸다고. 부디 건강하시라고.
지금 생각해도 참 넉살 좋은 행동이기도 했지만, 그 순간은 진심이었다.
내 안부는 챙겨주지 않아도, 당신들의 조카 손녀는 좀 생각해 주시라는 무언의 시위이기도 했다.

내가 남편과 혼담이 오갈 즈음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셨던 작은 고모님에게서 답장이 왔다.
소식을 듣고, 무슨 말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연락을 못했다 하셨다.
치료 잘 받고 부디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도 해주셨다.
...  

그 후로 가끔 고모님에게서 연락이 온다.
이젠 연세가 있으셔서 전화 통화를 못하시고 카톡을 보내시는데, 언제나 시작은 아이에 관한 이야기이고 내용은 내 병에 관한 성경적 조언들이다. 주로 기도를 열심히 하고 마음을 편히 먹으면 병을 이기는 데 도움이 된다는 내용들인데, 여든 가까이 되신 분의 마음이라 따지지 않고 그러려니 감사하다 답장을 드린다. 우리 엄마도 아니고, 이 악물고 따질 이유도 없고 말이다.


올해로 남편과 결혼한 지 8년이다.
결혼 준비과정부터 치열하게 머리를 쥐어짜며 투쟁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 덕에 지금의 균형감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이다. 결혼과 동시에 한 집안의 최하위 계급이 되어 평생을 착한 백치처럼 살 수는 없다며, 일찌감치 반기를 든 나 자신을 칭찬하는 밤이다. (물론 내 주변 사람들은 남편이 착한 것에 감사하라고 한다.)
이젠 둘째는 낳을 생각이 없느냐는 무례한 말을 인사랍시고 들어도 화를 내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시집 식구들이 다 우호적이고 좋지만은 않은 것처럼, 모든 사람들이 모두 나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인간 며느리로서의 내 지위는, 결국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 안에서 인정받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인간으로서의 내 존엄성이다.
설령 나를 애 낳는 도구로 취급한다면, 형님 당신이 둘째를 낳으라고 하면 될 일이다. 어디 손 아래가 감히라고 한다면? 우리에겐 '손절'과 ‘귓등으로 흘려듣기’라는 좋은 옵션이 있다.

끈끈한 가족의 정과 보호가 없어 아쉽고 슬플 수도 있다. 하지만 겪어보니 이 집안은 좋은 일에 끈끈하고 안 좋은 일에는 각자도생하는 가풍을 지녔다. 그러니, 내가 행복하게 살 궁리를 먼저 하는 게 현명했다.


역시 결혼 관계에서도 적당한 거리 두기와 타이밍이 필요하다.

무례함이라는 이름의 잽은 시집살이 뿐만 아니라 세상 어디에서도 훅훅 들어오기 마련이니까.

결국 나를 지키는 이는  자신 뿐이다.



이 글이 마음에 드셨나요?

작가가 연재한 다른 에세이와 엮어 책으로도 보실 수 있습니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가부장제는 싫어서

(작가 박상지) 입니다.




상지 : 商摯
*mail _ piaounhui@gmail.com
*insta_ @mintc_jaey : 일상계정
             @mintc_books : 글쓰기 북리뷰 계정

댓글과 좋아요는 저에게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시어머니와 친정엄마의 사랑은 다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