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봄이 좋다.
겨우내 얼어붙어 있던 마음을 다정히 어루만져주는 햇살이 있어서. "뭐든 할 수 있어"라고 등을 밀어주는 듯한 봄바람이 있어서.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조심스레 새싹이 돋아나는 걸 볼 수 있어서 좋다. 무엇보다 만개한 벚꽃을 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봄은 충분히 반가운 계절이다.
‘이제 봄인가?’ 싶은 날엔 다시 찬바람이 불었고 ‘아직 멀었나?’ 싶을 때엔 따뜻한 햇살이 스며들었다. 그렇게 밀고 당기듯 봄이 오락가락하던 3월, 아파트 앞마당에 핀 목련이 조용히 봄의 시작을 알렸다. 곧이어 당현천을 따라 꽃길이 펼쳐졌다.
4월이 되자 집 뒤 산책로 양쪽으로 줄지어 선 벚나무들은 연분홍 꽃잎을 활짝 피워내며 긴 가지를 늘어뜨렸다. 마치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렇게 연분홍 꽃들은 하나의 터널을 만들었다. 눈송이 같기도 하고 솜사탕 같기도 한 그 꽃들은 완연한 봄이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산책로는 벚꽃을 보러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꽃잎 사이로 사람들이 사진을 찍었고 연신 셔터 소리가 울렸다. 교복을 입은 소녀들은 떨어진 벚꽃 잎을 모아 흩날리며 영상을 찍었고 중년의 여성들은 소녀처럼 팔짱을 끼고 웃으며 서로의 사진을 남겼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벚꽃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지만 사진 속 진짜 주인공은 결국 벚꽃이었다. 벚꽃은 그렇게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신을 새겨 넣고 있었다.
벚꽃은 1년이라는 시간을 묵묵히 견뎌낸 끝에 고작 열흘 남짓한 절정의 순간을 보여준다. 그 찬란함은 너무 짧아서 사람들은 이 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 역시 기꺼이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그 벚꽃의 향연 속에 나를 맡겼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부터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가녀린 꽃잎들은 빗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졌다. 그렇게 수많은 벚꽃이 하루아침에 바닥으로 스러졌다.
겨울 끝자락에 내리는 봄비는 다음 계절을 향한 희망의 신호처럼 느껴져 반갑기 마련인데 이날의 비는 달랐다. 그건 벚꽃을 데려가버리는 비였고 마치 여름이 보내온 성급한 예고장 같았다.
언제부턴가 여름은 봄을 재촉하며 성큼 다가온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벚꽃의 환상은 아직도 선명한데 봄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한다니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질리도록 봄 햇살과 봄바람을 맞으며 질리도록 벚꽃을 바라보고 싶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벚꽃은 애초부터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래서 그토록 찬란했고, 그래서 그토록 아쉬웠으며, 그래서 우리는 매년 봄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