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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코끼리 Nov 16. 2020

천사할머니와 틀니

 <틀니 점검. 왼쪽 아래 잇몸이 아파요.>

 10시 스케줄을 확인하고, 오늘의 첫 환자를 보러 진료실에 갔다. 한 달에 한 번씩 틀니 점검 오시는 김할머니다. 오늘은 담당 원장이 수술 중이라 내가 김할머니 진료를 보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왼쪽 아래가 언제부터 아프셨어요?"

 진료의자에 앉으며 할머니 얼굴을 뵈니, 낯이 익다.

 "예. 좀 됐어예. 그냥 우리하지 뭐."

 '내가 뵌 적이 없는데......'라고 생각하며 틀니를 확인했다.

 "틀니 좀 제가 빼볼게요."

  잇몸 상태를 살펴보니 상처는 없다.

 "잇몸 아프다고 하신 데는 심하게 아팠던 거는 아니고, 좀 불편한 정도였던 거죠?"

 그제야 할머니가 웃는다.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여. 째깐 우리한 정도지."

 민망한 표정으로 허허허 또 한 번 웃는다. 웃으니 할머니 눈이 실처럼 가늘어 진다.     


 아, 생각이 났다. 우리 할머니를 닮았다. 우리 천사할머니. 어린 시절에는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게 무어냐 물으면 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다. 할머니. 다행히도 엄마는 나에게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냐는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아마 알았겠지만. 할머니는 나랑 언니가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 집 일을 도와주던 가사도우미였다. 우리 쌍둥이가 태어나면서 저절로 베이비시터 역할을 겸하게 되었다. 다들 기피한다는 쌍둥이의 베이비시터. 게다가 우리 엄마는 매일 밤10시가 넘어 퇴근했다. 그러니 자연스레 우리에게 할머니는 엄마 같은 존재였다. 긴 세월을 평일 내내 보다가 5학년이 되면서 할머니가 팔을 다치면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꾸준히 할머니와 연락을 하고 만나기도 하였지만, 커갈수록 횟수는 점차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끔찍이도 아꼈다. 꺼칠한 양손으로 우리의 고사리 손을 하나씩 잡고 시장을 가면 아는 사람들이 할머니에게 인사를 했다. 사람들이 묻지 않아도 얘기했다.

 "얘네 내 손주여. 쌍둥이 손주들."

 "그 집 아들 언제 결혼했대?"

 "아니. 우리 아들 말고. 저기 Y약국 집 딸들이여."

 할머니는 무슨 상이라도 탄 양 아주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고양이 수염처럼 양쪽 볼에 주름을 몇 개씩 만들고 껄껄껄 웃었다.     


 대학생이 되어 아르바이트로 하게 된 과외가 마침 할머니 집 근처라, 보름에 한 번 정도는 할머니를 뵈러 갔다. 누구보다도 우리 쌍둥이를 잘 구분하던 할머니가 너무 많이 늙어서 인지, 우리 얼굴이 너무 달라져서인지 매번 내가 언니인지 동생인지도 가끔 헷갈려했다. 그런데도 ‘언니는 한 번 울면 끝이 없이 울었고, 동생은 제 풀에 지쳐 "아이참 ,아이참."하며 달래달라는 표시를 했다’고. 그 얘기는 만날 때 마다 지겨울 정도로 했다. 마치 우리에 대해 생각나는 것은 그것뿐인 것 마냥. 성인이 되어 알게 된 것인데 할머니는 우리가 태어났을 때 진짜 할머니 같은 나이는 아니었다. 나는 정말 그 사실이 놀라웠다. 할머니는 내가 한 살 때 겨우 40대 후반의 나이였다.     


  "여기. 여기가 우리하게 아파."

 손가락으로 아래 잇몸을 가리키고 있는 김할머니 목소리에 우리 할머니 생각에서 잠시 빠져나왔다. 그러다가 김할머니의 얼굴을 다시 보고, 무척 닮은 모습에 울컥했다. 내 눈은 안경 속에서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내 마음은 울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십년 전부터 갑자기 이 세상에 할머니가 없어질 수도 있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있었고, 돌아가신 뒤에도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삶을 잘 지내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 마음이 지금 이런 상황에 자꾸 가라앉는 거지.     


  나는 틀니를 조절하면서 우리 할머니의 낡은 틀니를 생각했다. 나는 치과의사가 되었지만, 할머니에게는 결국 틀니를 새로 만들어드리지 못했다. 부산에서 경기도까지의 거리도 거리지만, 할머니는 대장암으로 병원에 자주 입원했다. 정작 돌아가신 건 대장암 때문이 아니라 넘어지면서 머리를 다쳐서였다. 할머니는 머리 수술 후 깨어나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돌아가셨다.  

   

 "잇몸 뼈가 너무 없어서, 여기에서 더 조절해버리면 틀니가 더 움직여서 여기저기 더 많이 아플 수 있어요. 오늘은 약간만 조절해서 적응해보시고, 불편하면 또 전화주시고 오세요. "

 흔들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김할머니에게 얘기했다. 김할머니는 연신 예.예.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나신다.

 "아이고, 고생했어예."

 차팅을 하다가 제일 앞면을 보니 김할머니는 만 80세가 넘었다. 오래도록 김할머니의 틀니점검을 해 드릴 수 있길. 내가 우리 할머니에게 못해드렸던 틀니에 대한 아쉬움을 김할머니를 볼 때마다 정성을 쏟을 수 있길. 그렇게 빌었다.

 "네. 안녕히 가시고, 또 불편하면 참지마시고, 꼭 또 오셔요"     


 천사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아마 이 순간 할머니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할머니 아픈데 없이 괜찮냐고. 할머니는 대답 할 테다.

 "나는 괜찮다. 우리 애기 밥 잘 챙겨먹고, 택시타지 말고, 문 꼭 걸어 잠그고."

 마흔을 앞둔 나를 할머니는 여전히 우리 애기라고 부르겠지. 내가 그 사이 둘째를 낳은 걸 알면, 우리 애기가 애기를 또 낳았다고, 얼굴에 고양이 수염을 만들며 껄껄껄 웃겠지.


할머니에게 첫째를 보여준다고 만나 삼계탕을 먹은 것이 할머니와의 마지막 식사가 되었다.  할머니는 우리 애기가 애기를 낳았다고 흐뭇하게 웃으셨다.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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