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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트코끼리 Aug 30. 2022

노을

SBS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2022년 7월4일 오전 라디오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에서 <이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의 일부 글을 낭독해주셨습니다. 몇년 만에 동기에게 카톡이 와서 알게 되었습니다. 출근길에 라디오를 듣는데 우리 쌍둥이 자매의 이름이 나왔다고, 설마 내가 아는 그 쌍둥이가 맞나 싶더라며. 언제 책을 냈냐고 축하 인사를 들었습니다. 김창완님의 목소리로 우리의 책이 낭독되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낭독된 글 입니다.



노을      

              

하늘이 붉게 물드는 시간은 황홀하고 안정적이다. 나는 그 사실을 유치원 때부터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모든 행동이 부자연스러웠던 나는, 이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나의 껍데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아니, 발버둥 자체를 칠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맞겠다. 온몸이 굳어 있는 기분이었으니까. 부디 아무도 말 시키지 말길,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 말길. 꾸역꾸역 그 긴 시간들을 버티면 늘 평온한 집이 날 맞이해주었다. 다정한 우리 천사 할머니와 함께.  


2층 집. 우리는 그 집을 그렇게 불렀다. 1층에는 갈비집이, 3층에는 작은 아버지 식구들이 살던 붉은 벽돌 집. 내 기억 속 가장 오래전의 집인데 어쩐 일인지 이 집에서의 우리가 가장 생생하게 떠오른다. 할머니는 늘 밤 9시까지 우리 집에 머물렀다. 2층 집에 도착하면 오빠는 학원을 가거나 엄마 일터에 같이 가 있는 날이 많아, 할머니와 언니와 나 이렇게 셋이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유치원에서는 서로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던 우리는 집에 오면 보통의 평범한 자매가 되었다. 우리는 크지도 않은 그 집에서 깔깔대며 숨바꼭질을 했다. 숨을 장소는 뻔하다. 소파 뒤의 틈, 안방 장롱 안, 커튼 뒤. 이제 더 이상 숨을 곳이 없으면 최후의 장소는 할머니의 긴 치마 안.

할머니는 매일 남색, 검정색처럼 어두운 색상의 긴 치마 서너 개를 번갈아가며 입었다. 윗도리도 서너 개를 매일 돌아가며 입었다. 자그마한 할머니의 치마는 늘 복숭아뼈 언저리에서 끝났다. 숨기에 적당한 곳이었다. 설거지를 하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붙잡고 속닥댔다.

“할머니! 언니가 나 찾으면 절대 알려주지 마. 모른다고 해.”

그리고 숨어 들어가는 할머니의 치마 속. 속바지를 입은 할머니의 다리에 찰싹 붙은 채 꽃무늬 몸빼 바지를 사각사각 만지며 조용히 언니를 기다렸다. 할머니는 진드기 같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달그락 달그락 설거지를 계속하고, 언니는 요리조리 떠돌다가 마침내 콩콩콩 달려온다.

“찾았다!”

키득대며 치마에서 나온 나의 눈에는 어김없이 부엌 창밖의 붉은 노을이 보였다. 주황색의 그 신비로운 빛은 내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켰다. 불안한 바깥 생활을 잘 버티고 비로소 우리 집이라는 사실이, 한결같게 긴 치마를 입은 우리 할머니가 늘 이곳에 있다는 사실이 날 무척 평온하게 해주었다.     


오늘 퇴근길에 바다 위의 노을을 보았다. 다른 날보다 유독 지친 나는 ‘오늘 저녁은 또 얼마나 아이들과 고된 시간을 보낼까’ 걱정이 되었다. 걷다가 다시 뒤돌아 노을 보고 또다시 걷다가 뒤돌아보기를 여러 번. 주황빛과 다홍빛의 노을은 무척 아름다웠다.

불현듯 할머니의 치마 속에 폭삭 숨어서 낄낄대던 기억이 떠오르고, 부엌일로 바쁜 할머니는 어쩜 짜증 한 번 안 냈을까 신기하기만 하다. 우리에게 늘 한결같았던 할머니 그리고 평화로운 노을이 지던 시간.

‘할머니, 나도 오늘은 짜증 안 내고 아이들한테 웃어줄게.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노을이 할머니인 양 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한다. 내 마음에도 울긋불긋 노을이 번졌다. 갑자기 나의 아이들이 보고 싶어져 발길을 서두른다.



뒤늦게 다시 듣기로 들어보니 낭독해주신 책의 내용 잘려서 안타까웠지만, 그 뒤의 김창완님의 멘트가 선물처럼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노을은 나를 숨길 수 있는 할머니의 치마폭일지 몰라요. 한낮의 빛처럼 나를 발가벗기지도 않고, 밤처럼 나를 잊지도 않을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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