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라피 수업에서 가벼운 글씨체를 배우며 저 글(살랑살랑 부는 바람 오늘 우리 떠나요 랄랄라)을 쓴 뒤, 나는 그대로 그 수업을 떠났다. 역시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하는 것은 나에게 참 힘든 일. 그렇지만 언제라도 다시 해 볼 요량으로, 잠시 주1회 수업 대신 주1회 자유시간을 갖기로 했다. 휴식이 필요하다. 몸이 다시 좋지 않다. 쉽게 피로하고 요통도 심해지고. 특별한 일이 없는데도 심장이 벌렁댄다.
견딜 수 없이 여행이 가고싶어져서 충동적으로 제주도로 가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요즘 밑 빠진 독에 물 붓듯, 돈이 안모아지는 시기라서 결제를 누르는 순간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예전에는 여행을 예약해 놓고나면 설렘이 시작되어, 짐쌀 때 최고조를 찍었는데, 요즘은 짐 싸는 일이 힘에 부치고 재미가 없다. 아이를 재우고, 캐리어에 짐을 한참 싸다보니 남편이 퇴근했다.
"내일이 여행인데, 하나도 신나지가 않아. 옛날에는 짐쌀 때부터 설레고 좋았는데....... 왜 그렇지?"
"왜겠노?"
나는 말 없이 한숨을 쉬며 세면도구를 넣었다. 우리 둘 다 말은 안해도 이유를 알고 있다. 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캐리어를 열자마자 아이 짐 챙기기에 여념이 없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여행가서 입을 옷이 중요했다. 특별한 곳에서 예쁜 옷을 입고 기분 내며 사진찍는 일이 가치있었다.
지금은 내가 입을 옷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애가 입을 옷이 중요하다. 따뜻하고 예쁘고 편한 옷. 내 사진도 많이 찍어야지 생각은 하지만, 돌아와서 보면 역시 아이 사진만 가득하다. 애꿎은 남편을 탓한다.
"자기는 어쩜 이렇게 내 사진을 안찍어줘?"
"니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난 사진 찍으면 못찍는다고 니한테 혼난다이가."
내가 짐을 싸는 순서는 이렇다. 아이 속옷, 내복, 아이 외출복, 세면도구, 어른 속옷, 어른 잠옷, 폰충전기 그리고 캐리어에 자리가 남으면 있으면 그제서야 갈아입을 옷을 챙긴다. 힘이 쭉 빠진채로 대충 아무거나.
제주도는 여전했다. 맑다가도 금세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바다도 맑고, 음식들이 무척 맛있었다. 아들을 위해 감귤따기 체험도 하러갔다.
애월에 있는 감귤밭을 검색해서 알게 된 아날로그 감귤밭. 서툴게 가위로 감귤을 따는 아이의 함박웃음을 보는 순간, 짐을 싸며 불행한 얼굴로 한숨을 내 쉬었던 시간이 후회됐다. 아들은 콧물을 줄줄 흘려가며, 꽤 많은 귤을 먹고, 그 보다 더 많은 양의 귤을 따 모았다. 무농약 감귤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얼룩덜룩 못난이 감귤들이 어느새 양동이 가득 쌓였다.
2박3일의 여정을 마치고 다음 날, 출근길 몸이 천근만근이지만 폰에 가득한 아들의 여행사진을 보며 힘을 내본다.
다음에 다시 찾을 제주는 또 여전하겠지. 변덕스런 날씨도, 맛있는 음식들도, 늘 생각보다 맑은 바다도. 혼저옵서예. 지친 모습으로 또 다시 찾아올 나를 위로해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