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작가가 각종 기념일을 활용하는 법
매일매일 오프닝과 퀴즈, 코너 아이템 등등을 고민해야 하는 라디오작가에겐 달력에 적힌 온갖 기념일들이 좋은 구실이 되어줄 때가 많다. 4월 22일, 오늘 달력엔 ‘정보통신의 날’이라고 적혀 있는데, 법정기념일이 아니라 달력엔 안 적혀 있지만 ‘지구의 날’이기도 하다. 오호~ 어떤 기념일은 도무지 아이템으로 연결할 여지가 없어 무용지물일 때도 많은데, 이번엔 둘 다 느낌이 좋다!
일단 ‘지구의 날’은 지구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 1970년 미국에서부터 시작된 날이라고 한다. 국가나 국제기구 차원에서 정한 기념일이 아니라 순수 민간운동에서 출발한 날이 세계인의 공감대를 얻어 범지구적 기념일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이런 사실과 함께 해마다 ‘지구의 날’이면 전국에서 자발적인 참여로 이뤄지는 소등 챌린지에 관해 소개하는 것으로 오늘의 오프닝을 해결한다. 소등 챌린지란 저녁 8시부터 딱 10분간 조명을 꺼두는 것인데, 고작 10분 동안 전깃불을 꺼두는 것으로 뭐가 달라질까 싶지만, 전국에서 다 같이 동참한다면 생각보다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한다. 오프닝을 쓰느라고 자료를 찾아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환경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공공기관과 공동주택, 대형건물들이 10분간 불을 끄면 절약할 수 있는 전력은 약 8만kwh. 기후위기의 주범인 이산화탄소 발생을 약 34t 감축시키는 효과인데, 어린 소나무 11,815그루를 심거나, 휘발유 약 15.9t을 덜 썼을 때 볼 수 있는 효과와 맞먹는다는 것이다. 나 혼자 실천하는 10분의 노력은 미미해도, 함께하면 미미한 노력이 커다란 효과로 돌아온다는 것. 당장 나부터 설득되는 이런 이야기야말로 방송에서 널리 알리고 선동해야만 하겠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힌다. 그래, 오늘의 오프닝 주제로 아주 좋았어, 나이스~!
그럼 또 하나의 기념일 ‘정보통신의 날’은 퀴즈 아이템으로 연결 짓기로 한다. 우리 방송에 매일매일 참여해주시는 고정 청취자층의 연령대는 대체로 높은 편이다. 그래서 옛 추억을 회상하기 좋은 아이템이 퀴즈로 나왔을 때 반응이 뜨거운 경우가 많다. 달랑 퀴즈 정답만 보내주시는 게 아니라, 각자 간직한 추억들을 함께 꾸려주시니 나눌 이야기가 풍성해진다. ‘정보통신’에서 그런 소재를 끄집어낸다면...? PC통신? 아니면 ‘삐삐’라 불리던 무선호출기? 공중전화? 그보다 더 옛날로 가보자. ‘전보’라는 통신 수단이 떠올랐다. 휴대전화는커녕 유선전화도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이전에, 급한 용건을 가장 신속하게 전할 수 있던 통신 수단. 요즘 아이들은 이 ‘전보’라는 게 무엇인지 알까? 흔히 ‘요즘 것들’이 줄임말을 쓰게 된 원흉을 인터넷 채팅으로 몰아가곤 하는데, 채팅창에 말을 빠르게 적기 위한 줄임말 이전에 우리에겐 이미 원조 ‘통신체’가 있었다. 전보의 기본요금은 보통 10글자까지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보의 시대부터 이미 말을 줄여 쓰는 데 어마어마한 내공을 키워온 것이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께서 위독하시다.”는 “조부위독” 네 글자로 줄일 수 있었고, “용돈이 다 떨어졌어요. 천 원만 보내주세요.”는 “천원송금요망” 여섯 글자면 되었다. 물론 이 경우엔 이렇게 버릇없는 뉘앙스가 될 수밖에 없는 전보보다는 구구절절 편지를 적어 보내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우리 청취자 한 분께서 전보로 보내야 부모님도 깜짝 놀라서 더 빨리 송금해주셨었다며, 본인의 대학 시절 찐 경험담을 들려주셨다. 그럼에도 ‘송금요망’보다는 ‘입금희망’이 좀 덜 괘씸해 보이지 않을까..라고, 또 다른 청취자께서 의견을 주신다. 이렇게 ‘전보’ 이야기만으로 또 추억이 방울방울 풍성한 이야깃거리가 만들어진다.
아쉽게도 우체국에서는 지난해 말에, KT에서는 올해 2월까지만 운영하고 전보 서비스를 종료했다고 하니 이제 민간에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린 통신 서비스가 되었다. 하지만 정치·외교 분야에서는 아직도 보안에 취약한 인터넷보다 전용 회선을 이용한 전보가 주요 통신 수단으로 쓰인다고. 가끔 뉴스에 나오는 “미국 대통령이 축전을 보내왔다” 할 때 그 ‘축전’이 바로 ‘축하 전보’의 줄임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봇대’라는 말도 원래는 전보를 전달하기 위해 세운 기둥이라는 뜻이었으니, 전봇대 사이를 걸어 다니는 우리는 여전히 '전보'의 흔적이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는 셈이 아닐까?
아무튼 이렇게 ‘지구의 날’과 ‘정보통신의 날’ 덕분에 오프닝과 퀴즈 아이템을 흡족하게 채워 넣고 보니, 문득 이 둘이 필연적으로 나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보면 지구는 이미 우리에게 여러 차례 짧고 굵은 메시지를 전보처럼 보내왔다. 옛 시절, 안부 인사도 없이 “송금요망”이라는 네 글자만 달랑 보내온 괘씸한 자식에게도 우리네 부모님들은 두말없이 용돈을 부쳐주셨고, 아무리 막돼먹은 자식이라도 가족 중 누군가 위독하다는 소식엔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는 게 당연했거늘, “지구 위독”이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이미 여러 차례 송달받고도 지금 우리는 너무 안일하고 태연한 게 아닐까? 그 옛날 ‘위독’이라는 말을 전보로 보내던 상황처럼, 지구가 우리를 기다려줄 수 있는 시간이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을지 모른다. 만사 제쳐두고 지구를 위해 달려도 부족할 시간에, 우리는 무엇이 지구보다 더 소중하기에 선뜻 내려놓고 달려가지 못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