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 싶어서 시작하는 반도체 전자산업 여성노동자 이야기
반올림 활동을 시작하고 첫 상담을 따라나선 자리였다. 2013년 봄, 상임활동가 셋이 충북의 한 시골을 찾았다. 삼성 LCD에서 일하다 폐암에 걸린 지혜 씨를 위해 아버지가 지었다는 흙집은 햇살이 잘 들어왔다. 손님에게 오리고기에 스타벅스 커피까지 정성껏 내왔다. 가족들과 어디로 놀러 갈 얘기 하며 여느 다복한 집과 다름없었다. 산재 상담을 위해 찾은 우리가 외려 낯설고 어색할 뿐. 무슨 일을 했는지, 병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위험한 건 없었는지 묻을 때 부모들은 자리를 떴고, 이질적인 질문을 하던 우리도 미안하여 바깥공기 마시겠다고 잠시 밖에 나와 무거운 숨을 돌렸다.
전주에서 따로 만난 지혜 씨도 그랬다. 조금 아는 사람 만난 듯 전주 한옥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비 오는 처마에 잠시 앉아있기도 했다. 병세가 깊어졌지만, 겉으론 여드름과 복수가 조금찬 배 말고는 티가 나지 않는다며 여름휴가 다녀온 얘기, 캘리크라피 배우는 담담히 얘기를 해주었다. 전자산업여성건강권 모임에서 준비한 삼성에서 기숙사 생활을 할 때 이야기, 일 말고 공부나 취미의 이야기를 나누긴 했지만, 무슨 소용일까. 서로 이따금 생각했었는지 이야기에 그리 불이 붙진 않았다.
노무사와 변호사가 지혜 씨 산재에 신경 썼을 동안에도 난 크게 떠올리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2년 후 반올림은 그녀를 추모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삼성전자 폐암 피해자 이지혜 님을 애도하며" 추모 성명서에는 일하고 위험했고 또 병에 걸려 힘겨웠던 세월이 담겼다. 짧게 만나지만 조금이나마 그녀의 삶을 더한 글을 쓰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애도였다.
그녀의 상태가 안 좋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지혜 씨의 이름을 이렇게는 만나지 말기를 바랐었다.
10년이 지났다.
최근 삼성 반도체에서 30년을 일한 여성 노동자를 만났고, 20년을 일한 여성 노동자를 만났다. 지혜 씨를 만났을 땐 비혼으로 일과 취미와 연애를 이야기 나누며 공감대를 나누기 좋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젠 일하며 임신과 출산 육아를 경험하고 또 일터의 여성 차별에 대해 되돌아볼 수 있는 중년의 여성들을 만난다. 주말 시간을 내어, 평일 오전 카페에서 남들이 즐겁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이곳에서는 아프기도 하고 고단한 얘기를 털어놓는다.
'삼성에서 일하다가 병에 걸렸다' 서사의 '삼성직업병' 키워드 이야기는 반올림 활동 16년 동안 많이 알려졌다. 활동가들은 산재신청을 위한 서면에 담기지 못한 이야기들, 과거가 아닌 오늘, 질병만이 아닌 삶, 회사 밖의 이야기가 더 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기회가 된다면 기자나 작가가 해주길 바랐다. 2세 직업병과 생식독성 문제를 다룬 <문제를 문제로 만드는 사람들> 때처럼 반올림에 쌓인 기록과 관계를 누군가의 글솜씨와 고민으로 풀어내지길 바랐다. 그러나 그 시간은 요원했고, 내가 듣고 싶어 졌고 기록하고 싶어 졌다.
나보다 더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고, 나보다 더 글을 잘 적어내고, 나보다 더 사안을 잘 아는 이가 있지만, 그냥 지금의 내가 만나고 이야기해보고 싶어 졌다. 지혜씨도 그랬지만 그들의 삶에서 궁금한 부분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