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
박근혜 퇴진을 외치던 2016년 12월 크리스마스이브였다. 20만 명은 넘는 촛불시민 앞에서 나는 반올림 이름으로 무대에 서서 핸드벨을 흔들며 노래를 불렀다. 길가는 밴드에서 비틀스의 '헤이주드'에 개사하여 만든 '박근혜야송'은 가사와 달리 너무나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촛불 앞에 내가 노래라니, 감격할 때 내 뱃속에 있던 '난자'도 또 다른 감격의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성직업병 문제를 올바로 해결하라며 삼성본관이 있던 강남역 8번 출구 앞에서 농성을 한 지 1년 3개월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농성을 시작한 지 7일 때 되는 날 결혼식을 하고, 피로연을 삼성본관 앞에서 했으니 2세 계획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참말인지 거짓인지 시가는 올해에는 아이가 생긴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고 싶어 했으나 12월이 며칠 남지 않았고, 나는 어김없이 밤농성 당번이었다.
마음씨 착한 종란은 새해도 다가오는데, 용진 씨랑 얼른 집에 가라며 배려해 줬고... 두고두고 '삼신할머니'는 그녀였다고 감사했다. 그렇게 용한 점쟁이의 말대로 아이를 가졌고 양가는 기뻐했다.
아직 남들한테 알리기도 조심스러운 임신 7주이지만 소식을 알려야만 했다. 비닐 몇 겹으로 월동 준비를 하고 난로를 피며 추위를 피하는 농성장도 길가의 소음도 무시로 드나드는 사람들도 내게(태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랐다. 커피를 건네는 이에게, 지하철 임산부 석에 앉은 이에게, 일찌감치 임산부 표시를 마패처럼 내보이며 나(태아)를 지켰다. 초기 입맛이 없어 살이 빠진 탓에 후로는 넉넉한 옷을 입은 덕에 5-6개월까지는 이어말하기 사회를 봐도 밖으로는 큰 표가 나진 않았다. 그러다 얼마뒤 아이를 낳았다고 하니, 소식 모르던 이는 놀라기도 하였다.
만삭 무렵, 박근혜는 드디어 퇴진했고, 퇴진 축하에 부른 배를 앉고 촛불 배지를 가슴에 달았다. 나중에 아이랑 닮은 듯해 남들은 모르는 뿌듯함을 느꼈다.
아기가 100일 될 즈음 반올림은 <클린룸이야기> 다큐가 막 나왔던 시기였다. 아이를 키우는 고단함과는 다른 무료함이 있던 터라 GV 사회를 맡아달라는 반올림의 요청이 반가웠다. 아이를 처음 반올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도 한 날, 내가 잠시 사회를 볼 동안 밖에선 아이와 종란, 종선 두 자매는 진땀을 뺐었다고 한다.
1000일 농성 문화제에 아이와 함께 광명역에서 강남역까지 간 날, 전날부터 긴장하여 준비하고 당일날 온 힘을 다해 오가는 통에 나는 혼이 났다. 그나마 아이를 꼭 안은 혜경 씨의 손아귀가 단단해서 안심이었고, 다행히 아이도 돌아오는 길 잘 잤다. 중간에 젖을 먹어야 할 때는 농성장 앞 어느 변호사사무실을 이용했다. 신기하여 두리번거리느라 아이는 거의 먹지 않았지만, 농성장이라도 아기를 배려하는 문화에 마음만은 편했다.
그렇게 생기고 자란 아이는 그 후 반올림 행사마다 회의마다 수시로 등장한다. 아파서 유치원에 못 가면 으레 반올림 사무실에 가는 줄 안다. 펜, 스케치북, 인형 챙겨 들고 소파가 있던 방을 차지하고서 티니핑 색칠공부 프린터 해달라고 당당히 요구한다. 북토크 때에는 중간에 앉아서 떠들지도 못하고 자리를 지키느라 애쓴다. 온라인 회의에 종란 이모, 승규 삼촌이 보이면 반갑게 인사하고, 짜장면 같이 먹은 상수 삼촌에게도 이제 반갑게 인사한다. 반올림이 혜경씨네랑 황상기 어르신과 모처럼 가을 여행을 가려 준비를 한 날, 유치원에 안 간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 거다. 어르고 달래다 난감함에 "같이 갈래?" 했더니 장난감 가득 든 여행캐리어를 끌고 나선다. 그날 저녁 식사 후 모두가 미미 인형에 옷 입히고, 집 장식하고 놀았다. 유미 씨 추모제가 있는 3월, 이젠 당연한 듯 유치원에 '엄마 출장에 따라갑니다' 메시지를 남기고 속초에 따라간다. 닭강정도 먹고, 갯배도 세 번씩 타고, 잠옷바람으로 승규 삼촌 방에서 밤늦게까지 놀고, 추모제날 유미 씨 사진 보며 저 이모 춥겠다고 걱정하며 바쁘다.
반올림 활동과 딱 붙어있는 아이가 될 수 있었던 건 내가 일하는 곳에 내 생애주기에 맞춰 노동 시간과 노동 방법을 바꾸어주었기 때문이다. 양해해 주기도 해고, 내가 당당히(뻔뻔히) 요구하기도 했다. 여성 노동자라면 걱정이 많을 임신 출산 육아의 시기, 마의 초등학교 입학 시기, 내가 덜 걱정하는 이유는 반올림이 그간의 아이를 키우는 양육자에게 어떤 배려를 해줬는지 알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도 또 힘듦은 생기지만. 그러지 않는 일터라면 그 고충은 얼마나 클까. 일을 계속할 수는 있을까. 싶다.
이참에 덧붙이는 말. 반올림 활동 중 언제 어디서든 마주치는 아이를 환대해 줘서 고맙습니다.
덕분에 잘 키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