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20년만에 처음으로 무소속 직장인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6시 30분, 익숙한 알람 소리가 고요한 방을 가른다. 지난 20년간 조건반사처럼 몸을 일으키게 했던 소리.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눈을 뜨자마자 밀려왔던 그날의 업무압박들.. 평소처럼 억지로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대신, 나는 잠시 그 소리와 방안의 온도, 그리고 내 옆에서 잠든 딸의 숨소리를 들으며 달콤한 시간의 흐름을 귀와 코, 피부로 느꼈다. 일어나는 것이 더는 의무가 아닌 선택의 문제.
‘일어날까, 조금 더 이불의 온기를 느껴볼까.’
이 작은 고민을 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슴 한쪽이 뻐근할 정도의 낯선 평화가 밀려왔다. 오랫동안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고, 다음 회사로 출근하기 전까지 허락된 12일의 시간. 그 첫 아침에 내가 느꼈던 감각이었다.
돌이켜보면 지난 과거의 퇴근 이후의 저녁 시간과 주말은 휴식이 아니었다. 소파에 몸을 뉘어도 머릿속은 처리하지 못한 일과 곧 닥쳐올 일들의 목록으로 윙윙거렸다. 잠시 눈을 감아도 다음 월요일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해야 하는 ‘대기 상태’에 가까웠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어도 체력은 소모되었고, 감정은 메말랐다. 항상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체력도, 감정도, 여유도 없는 마라톤 같았던 20년간의 직장생활.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나를 매일매일 옭아매던 수많은 단체 카톡방의 목록을 내려다보며, 채팅방에 떠있던 빨간색 읽지 않은 메세지 숫자가 줬던 압박감을 자연스레 벗어나기 위해 하나씩 ‘조용히 나가기’ 버튼을 누를 때마다 묵직한 족쇄가 풀리는 듯한 해방감, 그리고 괘감을 느꼈다.
'잘있어라. 나는 조용히 떠난다. 너희끼리 좋은 이야기 많이해라.'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울리던 휴대폰 너머의 모르는 번호는 더 이상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압박이 아닌, 그저 나와 상관없는 무심한 숫자들의 나열일 뿐이었다. 이런 사소한 변화들이 모여, 나를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껍질에 비로소 숨 쉴 틈을 만들어주었다.
2006년 대학교 4학년을 졸업도 하기전에 회사에 입사하여 달려온 20년의 시간을 되돌아 보게 된다. 아무것도 몰랐던 신입사원에서 부서장까지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시간들이 어제 일처럼 다시 떠올랐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리고 어떤 방향을 가지고 달려왔는지 전혀 모른채 그냥 앞만 보고 시간이 흐르는대로 달려 왔던 것 같다.
오늘 아무런 직책도 업무도 책임도 없는 시한부 백수의 신분은 지난 20년을 쉼 없이 달려온 나에게 처음으로 주는 ‘진짜 여유’라는 따뜻한 감각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이 휴식은 무언가로 채워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시간이었다. ‘직장인으로서의 나’라는 익숙한 가면을 내려놓고, 먼지 쌓인 ‘본래의 나’와 마주하는 시간. 비로소 나 자신으로 고요히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이 12일이 지나면 나는 또다시 어느 조직에 속해 하루를 돌아볼 틈도 없이 앞만 보며 달려갈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지난 20년의 시간을 묵묵히 이겨내 왔던 과거의 내가, 오늘의 나에게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단단한 자신감을 속삭여주기 때문이다.
이 짧은 휴식은 멈춤이 아니라, 다음 걸음을 힘차게 내딛기 위해 깊게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마침표가 아닌,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이어주는 느긋하고 소중한 쉼표다. 이 고요하고 충만한 쉼표의 시간이, 분명 나를 더 단단하고 선명한 사람으로 빚어줄 것이라 믿는다.
"모든 직장인 여러분 너무나 고생이 많으십니다. 오늘도 너무 힘든 하루 살아오신 여러분의 내일이 정말로 화려하길 바라겠습니다."
★ 사진 설명
시한부 백수 생활 첫날 아이들을 학교보내고 와이프와 둘이서 오랜만에 경주 황리단길을 여행왔습니다.
여행와서 "청수당 경주"에서 처음마신 자유의 아메리카노
책들이 많은 곳은 경주 황리단길에 있는 "어서어서"라는 독립서점
사진에서 자유가 느껴지실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