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걸음 뒤의 풍경

우리의 일상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이다

by 민토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났지만, 모니터 오른쪽 하단에 떠 있는 시간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처리해야 할 업무 목록은 줄어들 기미 없이 빼곡하고, 메신저의 알림은 쉴 새 없이 깜빡이며 새로운 과업을 실어 나른다. 마치 거대한 톱니바퀴에 끼어버린 것처럼,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페달을 밟았지만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도는 기분.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일이 주는 성취감이 아니라, ‘해치워야 한다’는 압박감과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막막함뿐이다.




​머릿속은 뒤엉킨 실타래 같다. A 프로젝트의 보고서를 마무리해야 하는데, B 업체의 갑작스러운 요청이 끼어들고, C팀의 협조 메일에는 아직 답장도 못 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어디까지가 오늘 해야 할 일인지 경계는 흐릿해지고, 그저 눈앞에 닥친 가장 급한 불을 끄는 데에만 급급하다. 시야는 한 뼘짜리 모니터 안에 갇혔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응원이 더 이상 힘이되어 주지 않는다.



​그런 며칠이 계속되자 일의 능률은커녕 마음의 평화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조급함과 싸우며 스스로를 몰아붙일수록, 문제는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복잡하게 얽혀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더는 한 줄도 쓰지 못할 만큼 머리가 굳어버린 기분에 의자에서 일어났다. 답답한 사무실을 잠시 벗어나 텅 빈 복도를 걸으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까만 밤하늘 아래, 도시의 불빛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은 채 반짝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풍경을 바라보는 동안, 뜨거웠던 머리가 조금씩 식어갔다. 그때였다. 산더미 같은 일더미에서 한 걸음 떨어져 서자, 그 안에서 아등바등하던 내 모습이 문득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내가 왜 이렇게 허덕이고 있을까?’, ‘이 모든 일들이 정말 오늘 당장 해야만 하는 일일까?’

치열한 전장에서 잠시 벗어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요도와 상관없이 그저 쌓여있는 순서대로 일을 처리하려 했던 나의 미련함이 보였다. 이겨야 할 대상은 동료나 일이 아니라,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나 자신의 강박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의 목표는 결국 ‘일을 잘 해내는 것’이었는데, 어느새 ‘일을 그저 없애는 것’에만 집착하고 있었음을.



​『채근담』은 말한다.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이 곧 나아가는 바탕이다.” (退步卽進步之本)

일의 홍수 속에서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때로 도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 물러섬은 결코 포기가 아니라,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 잠시 숨을 고르는 지혜다. 무작정 손을 움직이는 대신, 잠시 멈춰 어떤 길로 가야 할지 지도를 살피는 시간이다.

​자리에 돌아온 나는 새로운 문서 파일을 여는 대신, 깨끗한 메모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뒤엉켜 있던 모든 업무를 쏟아낸 뒤,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 세 가지만을 골라 번호를 매겼다. 나머지는 과감히 내일의 몫으로 넘겼다.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본 풍경 속에는, 거대한 장벽이 아니라 오르내릴 수 있는 몇 개의 계단이 있었다.



​때로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 책상 앞이 아닌, 한 걸음 뒤에 서 있을 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그날의 고요한 복도에서, 멈춤의 기술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배웠다.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마법처럼 해결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업무는 산더미처럼 쌓이고, 예기치 못한 요청들은 틈틈이 비집고 들어온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진 것이 있다면, 바로 그 일 더미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다. 이제 나는 무작정 정상으로 돌진하는 등반가가 아니라, 지도를 펼쳐들고 잠시 숨을 고르며 가장 효율적인 경로를 찾는 탐험가가 되었다.




​책상 앞에 작은 화분을 하나 두었다. 일이 풀리지 않을 때, 조급함이 목을 죄어올 때면 잠시 그 푸른 잎사귀를 바라본다. 그것이 나에게는 텅 빈 복도의 창밖 풍경을 대신하는 ‘한 걸음 뒤’의 공간이 되어준다. 그 짧은 멈춤의 순간, 뒤엉켜 있던 생각의 실타래가 스르르 풀리는 경험을 나는 이제 믿는다.



​혹시 지금 당신도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끝없는 업무의 숲속을 헤매고 있다면, 아주 잠시라도 괜찮으니 걸음을 멈춰보길 권한다. 한 걸음 물러서서 당신이 지나온 길과 가야 할 길을 조용히 응시해보길 바란다. 그 한 걸음의 여유가 만들어 낸 새로운 풍경 속에서,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오솔길 하나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