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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Nov 14. 2021

산타는 이제 졸업하자, 아이야.

주말. 아침을 먹자마자 9살인 첫째 아이가 같이 레고를 가지고 놀자고 졸랐다.

그래, 주말이니 그쯤이야.


아이의 방에 가니 이미 레고 전함이 방 중앙에 놓여있고 작은 전함들이 그 주위를 감싸며 대충 전투태세를 잡고 있는 게 보였다.

그중 전함 하나를 잡았더니 아이가 그건 자기네 편이라며 내게 우중충한 검은 레고 피겨 (figure)와 머리가 뱀인 피겨 하나를 내밀었다.


즉 내 담당은 ‘나쁜 편’이란 소리다.

그래, 이런 놀이에는 악역이 등장해야 맛이지. 그래도 지는 거대 항공모함에 작은 전함, 로봇으로 변신 가능한 전함까지 갖췄으면서 나한테는 꼴랑 피겨 둘만 주길래 좀 치사한 거 아니냐고 따졌더니, 악역 대장이 죽어서 다 잃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목과 몸이 분리된 체 떨어져 있는 보라색 피겨를 가리켰다.


개연성이 충만한 이야기라 나도 혼신의 힘을 다해 놀아주기로 했다.


까만 피겨를 흑마법사로 부리고, 뱀 머리 피겨 더러 보초를 서라고 옆에 세워 둔 뒤 혼령술을 부렸다.


“어둠의 기운이여! 수리수리 마하수리, 죽음의 언덕에서 다시 돌아오라, 푸슈욱~~!!”


그러고 있는데 이 꼬맹이가,


“Ha.ha. Very funny mummy, just put the head back on” (하하. 정.말. 재.밌.네.요. 엄마. 그냥 목 붙이세요)


이러는 게 아닌가! 아니, 놀아달라더니 이 꼬맹이가 감히 내 노력을 하찮게 비웃다니!


솔직히 좀 충격받았다. 내가 아이의 수준을 잘못 측정하고 있었던 건지, 아니면 정말 내 시도가 그토록 유치했거나..;;




11월이 되자마자 우리 집 아이들의 핫토픽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되었다. 산타에게 어떤 선물을 요청할 것인가에 대해 둘이서 머릴 맞대고 진지하게 고민을 하더니, 첫째가 비장하게 말했다.


“I’ll ask for PxxS..n 5”


듣자마자 기가 차서 “아니, 안될걸?” 하고 단호하게 조언해줬더니, 눈을 땡그랗게 뜨며 “왜요?” 하고 되물었다. 그래서 일단,


“Because Santa has a buidge limit” (산타도 예산 제한이 있으니까)


하고 답해줬더니,


“Then Santa can ask Elves to make one” (그럼 산타가 엘프들한테 하나 만들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러길래


“That’s against copyright” (저작권 때문에 안된단다)


했더니, 이번에는


“Then Santa can pay to buy one” (그럼 산타가 돈을 주고 사면 되잖아요)


한다. 그래서 다시 그건 산타의 측정 예산보다 높아서 안될걸, 하고 답해줬더니,


“Then Santa can ask Elves to make money” (그럼 산타가 엘프들한테 돈을 만들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러길래 어이가 없어서,


“That’s illegal” (그건 불법이란다)


하고 친절하게 대답해줬는데도 이 꼬맹이는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찌나 말도 잘하는지. 어찌나 얄밉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지는지;;


그렇게 한참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질문에 답하느라 산타와는 거리가 먼 화폐경제까지 설명한 다음에야 아이는 포기했는지, 그럼 레고 세트를 사달라고 하겠다며 편지를 쓰러 갔다.


아이가 간 뒤 남편과 나는 마주 보며 한숨을 내쉬다가 도대체 이 상상과 현실의 경계에 애매하게 선 산타에 대해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잠깐 고민했다. 안 그래도 작년에는 산타가 어떻게 다 잠긴 창문과 문을 통해 집안으로 들어오는가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다가 또 이상하게 대화가 흘러가서 결국 허락 없이 사유지에 들어가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산타는 부모가 출입을 허락한 집에만 ‘마법의 힘으로’ 들어와서 선물을 놓고 갈 수 있다’라는 결론을 내리며 끝을 보긴 했는데, 올해는 산타의 예산 측정에 대해 토론을 하게 될 줄이야.


솔직히 이쯤 되니 아이가 진짜 산타를 믿긴 하는 건지, 아니면 부모를 엿, 아니,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건지 의심이 되기도 한다.


그래 놓고 열심히 편지를 써서 우체국에 가져다주며,


“Can you deliver it to the North Pole?”


하고 해맑게 묻는 걸 보면 아직 어리긴 한 거 같은데… (우체국 직원은 이런 일이 흔히 있는지 우리보다 훨씬 더 자연스레, “Of course”하고 답하셨다. 역시 전문인)


첫째와 둘째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우체국 직원이 주는 우표를 봉투에 붙이고 빨간 우체통에 집어넣으며 환하게 웃었다. (솔직히 우리는 저렇게 산타에게 무작정 보내는 편지들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직원에게 묻고 싶었지만, 왠지 알아도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은 정보라 애써 묻지 않았다.)


남편과 나는 그제야 저 편지 안에 우리가 모르는 정보가 들어있을까 봐 불안함에 잠시 서로를 마주 봤고.




그래. 솔직히 그동안 오래 해왔다. 산타고 뭐고 간에 믿지 않는 지독한 논리 주의자인 남자와 산타 따위 돈 있는 집에만 선물을 배달해주는 자본주의의 표상이라며 시니컬하게 비판하던 여자가 만나 9년 동안 아이들을 위해 그림자 산타 노릇을 하고, 크리스마스이브날 저녁에 reindeer 먹이라며 정원에 반짝이를 뿌려댔으면 할 만큼 한 거 아닌가.


그래서 첫째 아이에게 말했다.


“그거 아니, 산타는 열 살 전의 아이들에게만 선물을 배달한단다. 그러니 내년부터는 네 부모에게 잘 보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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