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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Dec 24. 2021

영국의 크리스마스

영국에 나온 지 거의 20년이 되어 가는데 그중에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대충 손가락만 사용해도 충분한 숫자가 나올 것 같다. 


굳이 기억을 끄집어내서 손꼽아 보자면... 

한 번은 영국인 친구 집에 초대받아서 그녀의 가족들과 박싱데이 (Boxing day - 12월 26일)까지 보낸 뒤 27일에 기차 편이 다 취소되어 6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돌아왔고, 한 번은 컬리지에 남아 있다가 같이 박사과정을 하던 중국인 가족 (부인과 아이를 데리고 유학 온 상황)과 함께 온갖 요리를 해 먹으며 크리스마스라기보다 설날 같은 날을 보냈었고, 두 번 인가는 당시 만나던 영국인 남자 친구 집에 초대받아 그의 가족과 보냈으며, 또 한 번은 지금 남편과 함께 첫 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에 시달려서 아무것도 먹지 못한 체 보냈고, 가장 최근의 기억은 3년 전인가, 여권 때문에 두 아이와 남편과 보낸 크리스마스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 크리스마스를 영국에서 보낸 기억은 없으니 아직 두 손을 쓰기에도 좀 허전한 숫자이긴 하다. 그리고 올해도 우리는 Omicron 때문에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크리스마스,라고 해도 좀 시큰둥한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주위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 영국에서 또 한 번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김에 여기는 이렇답니다, 하는 이야기. 


Christmas Quiz 


매번 생각하지만 영국인들은 참 퀴즈를 좋아한다. 크리스마스 때가 아니라도 Pub Quiz Night은 웬만한 펍에 Curry Night과 함께 등장하는 단골 이벤트다. Curry Night 혹은 Steak Night 같은 게 특정 메뉴를 정해진 날 즐길 수 있는 이벤트라면 Pub Quiz Night 혹은 Open Mic Night은 activity가 주가 되는 이벤트다. 펍 퀴즈는 보통 그룹이 조를 짜서 참가하고, 일반 상식 (그러나 주로 연예 상식 따위)을 묻는 질문이 많은데 마지막에 가장 많은 스코어를 얻은 팀이 우승하고 그에 관한 작은 소정의 상품이 있거나 음료를 공짜로 주거나, 아니면 아무런 경품 없이 진행되는 곳들도 있다. Open Mic은 간혹 노래자랑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곳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노래방 기기를 갖다 놓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나와 노래하는 행사다. 


왜 이 소리를 하고 있냐면, 회사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할 때 정말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이 퀴즈를 해대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영화 장면을 보고 영화 제목을 맞춘다던지, 메인 배우 이름을 맞춘다든지, 수수께끼 같은 도형과 형용 문자 같은 걸 늘어놓고 크리스마스 노래를 맞춰야 한다든지, 크리스마스 관련 음식으로 십자말 풀이 (crosswords)을 하라든지.. 하여간 종류도 많은데.. 정말 이럴 때마다 곤혹스럽다. 


예를 들어 Bread source란 게 있다는 걸 영국 생활 대충 20년 만에 처음 알았다.  Gloria in excelsis라는 노래는 들어보지도 못했고. 영화 제목이나 배우 이름은 원래 잘 외우지 못하는 편이니 애초에 포기했고. 


그래서 생각해본 건데... 영국은 확실히 '알아야 즐길 수 있는' 게임 종류가 꽤 많은 것 같다. 영국인 가족들이 크리스마스 때 가장 많이 한다는 보드게임 scrabble도 사실 영어 단어를 웬만큼 아는 게 없으면 기 빨리는 게임이고, 퀴즈 게임도 그렇고. 이런 게 싫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내게는 꽤 재미없는 게임들이라 불평해봤습니다;; 


(참고로 그에 비해 한국에서 하는 게임은 일단 룰만 알면 다 참여할 수 있는 종류가 꽤 된다. 거기다 언어 장벽도 거의 없는 편이고.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그게 더 여러 사람이 즐길 수 있는 방법 같은데.. 뭐 사는 곳이 영국이니 어쩌겠어요..) 


Christmas gifts


영국은 확실히 스페인보다 상업적인 분위기가 훨씬 짙다. 11월부터 슬금슬금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하는 크리스마스 장식들부터 쇼핑을 하라고 아주 난리를 친다. 그리고 실제로 영국인들이 크리스마스 때 선물을 준비하는 걸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처음에 영국인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 친구 가족에게 줄 선물을 딱 하나 준비해 가서 얼마나 속으로 부끄러웠는지. 그도 그럴게, 크리스마스 때 대부분 한 사람당 2-3개 이상의 선물을 준비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내가 온다는 소리에 친구의 가족들은 물론 그때 만나게 되는 그녀의 친척들도 작은 초콜릿이나마 내게 건넸다. 나는 주는 것도 없는데 크리스마스 아침에 장장 한 시간에 걸쳐 진행되던 선물 주고받기 시간 동안 얼마나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듯 불편했는지. 


나중에 영국인 남자 친구네 집에 초대받아갔을 때는 나름 준비한다고 했는데도, 그 양뿐 아니라 그 스케일에 놀라서 심각하게 그냥 가지 말까, 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다. 그 가족들 역시 한 사람당 3개 이상의 선물을 준비했는데, 자잘한 초콜릿과 책부터 시작해서 꼭 아주 고가의 선물이 하나씩 끼어있곤 했다. 고가의 위스키는 그나마 나은 편이고 100파운드를 훌쩍 넘기는 전자기기들까지.. 


스케일이 전에 갔던 영국인 친구네 가족들과 달라서 얘네만 이런가 하고 넘어갔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이런 집이 꽤 많았다. 특히 아이가 있는 집에는 거실 전체를 덮을 정도의 선물들이 놓인 경우도 봤다. 그 집의 원래 경제 사정이 좋든 아니든 크리스마스에는 선물에 진짜 열과 성을 바치는 거다. 그러다 보니 이해하게 되었다. 왜 여자 친구들이 10월도 되기 전에, 아니 어떤 친구들은 여름 세일 기간 때부터 크리스마스 때 줄 선물을 미디 사다 놓기 시작하는지. 


(솔직히 선물을 사야 한다는 부담만 없으면 영국이 쇼핑하기에 좋은 나라인 건 사실이다. 크리스마스 전 세일부터 26일 이후 바로 대대적인 세일 기간에 들어가니까. 반면 스페인은 크리스마스 휴가가 보통 1월 6일까지 이어지기 때문에 세일 덕을 본 적은 별로 없다. 영국은 보통 1월 3일, 4일부터 휴가가 끝나버리니까) 


Christmas jumper 


예전 대학에서 일할 때 12월 1일부터 매일 크리스마스 점퍼를 입고 출근하는 동료 교수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점퍼는 말 그대로 크리스마스 장식이 되어 있는 스웨터 종류를 말하는데 (루돌프나 크리스마스트리가 그려져 있다거나, 눈꽃 같은 장식이 되어 있거나, 딱 보기만 해도 하얀색, 빨간색, 녹색이 어우러져 크리스마스 같거나). 


동료에게 도대체 몇 벌이나 있는 거냐고 물어보니 대충 10개가 넘는다고 했다. 크리스마스를 꽤나 좋아하는 사람인가 보다 했더니, 그게 아니라 매해 크리스마스 때 선물로 받다 보니 쌓인 게 아까워서 12월 한 달 내내 돌려 입기 시작한 거라고.. (선물의 폐해가 이렇게 나타나는 거다;;) 


저렇게 타의 반 자의 반 입게 되는 사람도 있지만, 실제로 크리스마스 점퍼를 좋아하는 사람도 꽤 된다. 특히 여자 동료나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12월에 매일 루돌프 귀걸이나 눈사람 목걸이 같은 걸 하고 나타나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어떤 친구는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편한 크리스마스 점퍼나 파자마를 입고 역시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수면양말을 신고서 하루 종일 뭘 먹거나 마시면서 티브이를 보는 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참고로 내게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점퍼가 없다. 도대체 일 년에 한 번만 입는 옷에 왜 돈을 쓰나 싶어서 내 돈 주고 산 적도 없고, 지금 남편 역시 그런 데 흥미가 없고, 예전 영국인 남자 친구가 슬쩍 물어본 적은 있지만 대신 빨간 스카프가 낫다고 설득해서 그걸로 받았었다. 차라리 그게 실용성 부분에서 쓸데가 더 많았으니까) 


Christmas decoration 


매번 생각하지만, 영국인들은 크리스마스 장식에 정말 진심이다. 가게야 비즈니스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겠지만, 집은 물론이고 회사도 가만 두질 않는다. 물론 회사 입구나 리셉션 쪽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는 것 정도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Covid가 벌어지기 전 12월에 직장동료들이 무려 3 상자나 되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꺼내 들고 책상이며 천장, 창문에 주렁주렁 걸기 시작했을 때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게다가 아직도 꽤 많은 집이 진짜 소나무를 잘라다 장식하는 걸 전통으로 여기고 있고 (이거 시간 지나면 바닥에 솔잎들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해서 계속 청소해 줘야 한다;;), 밖에 불이 들어오는 장식을 해둔 집들도 많은 건 물론 꼭 동네에 하나씩 무슨 야간 개장한 놀이동산처럼 꾸며놓은 집들도 있다. 


그런 걸 보면 참 예쁜데, 가끔 가다 보면 크리스마스 때 무슨 한풀이하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한다. 이날만은 화려하게, 밝게, 걱정 없이! 그런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깔려있다고 할까. 


반면 스페인은 아직도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편이다. 밖에 거는 장식이라고 해봐야 아기 예수가 그려진 천 정도고, 그림도 성당 벽화 같은 풍이다. 대놓고 화려한 장식보다 곳곳에 Nativity라고 해서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를 재현해 놓은 것들이 훨씬 많기도 하고. 


(참고로 나는 나중에 치우는 게 귀찮아서 최소한의 장식만 하는 편이다. 크리스마스트리도 아이들이 크기 전에는 사지도 않았다;;) 




아직 음식이라든지 크리스마스 당일 날 풍경이라든지 할 말이 좀 더 많긴 하지만, 그러다가는 끝도 없을 것 같아 그만해야겠습니다. 참고로 전 이번 크리스마스에 따로 요리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저번에 영국식으로 해보겠다고 오전에 3시간에 걸쳐 Turkey 굽고, 고구마 으깨서 꿀과 견과류 올리고, gravy 만들고, stuffing 만들고, 당근/감자도 시간 맞춰 오븐에 집어넣고, 요크셔푸딩 굽고.. 그 난리를 쳤는데, 먹고 나니 남은 건 설거지 거리밖에 없더군요.. 크리스마스 저녁에는 녹초가 되어 기분이 아주 나빠졌기 때문에 올해는 아예 시도도 안 할 생각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무래도 지금 일하는 곳이 영국인들이 득실거리는 공무원 조직이라 그런가.. 다들 영화처럼 막 들뜨고 가족들과 화기애애한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건 아니란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긴 한국에서도 설날, 추석이라고 다들 호호 하하 거리며 음식 해 먹고 윷놀이하며 보내진 않으니까요. 


특히 올해 크리스마스는 코로나바이러스 변종 때문에 또 발이 묶인 사람들도 꽤 되고. 


그러니 당신이 어떤 크리스마스를 보낼 계획이든 부디 건강하기만을 바랍니다.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된 크리스마스든 촛불 하나도 켤 수 없는 크리스마스든, 선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든 아니든. 다만 건강하시길.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무사히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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