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묘한 언짢음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딱히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아주 미묘하게 신경을 긁는 것 같은 이 기분 말이다.
최근에 연말이라 그런지 연말 결산의 성격을 띤 아주 많은 workshop/ away day 등등이 있었다. 당연히 뭘 발표하거나 준비해야 할 것도 많았고 말이다.
처음 시작은 동료인 L이,
“I’m nearly done with xx (연말 결산 발표). I just want to let you know so that you won’t feel bad even if you have not done it yet”
(나 연말 결산 발표 거의 다 했는데, 혹시 네가 안 했더라도 괜히 기분 나빠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거야)
하는 말이었다. 솔직히 들으면서 응? 저게 뭔 소리야? 하긴 했다. 그 말에는 아주 당연하게 내가 그 발표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걸 전제하고 있었기에.
어떻게 보면 내가 지금 자리로 올라온 지 두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 짬밥 먹은 선임이 신참 생각해준다는 말로도 들릴 수 있겠지만, 솔직히 좀 어이없었다. 마치 내가 실패할 걸 이미 예상이라도 한 것 같아서. 그리고 난 이미 그 연말 결산 발표를 끝내서 제출까지 한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대충 웃으며, “Don’t worry, I’ve already done it and submitted it” (걱정 마, 벌써 다 해서 제출했으니까) 하고 답하자 살짝 일그러지는 표정이 사실 좀 고소하기도 했다. 내가 아무리 newbie 라도 공짜로 이 자리를 꿰찬 건 아니니까.
발표 날.
반응이 좋았고 boss에게서 따로 오늘 발표 좋았다는 메시지까지 받았다. 그리고 동료인 H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같이 앞으로 잘해보자며 따로 연락을 잡기도 했다. 다른 동료인 D는 자기가 visualisation에 약하기 때문이라며, 그 결과가 내 ppt slides 때문인 것처럼 축소시켜 말했다. 내가 무슨 거대한 비디오를 찍어 상영한 것도 아닌데.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프로젝트 회의가 있었다. 아주 복잡한 주제인 데다가 시간도 딱 1주일밖에 주어지지 않았기에 3일 동안 야근까지 하며 기획서를 마무리 지었다.
다른 동료들이 기획서를 제시간에 마감 짓지 못했기 때문에 내가 해낸 결과물만 상부로 올라갔고, 통과되었다.
다른 동료들에게는 내가 한 자료를 바탕으로 그들의 기획서도 마무리 지으라는 지시가 내려갔다. 뭐 그때까지만 해도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전체 부서 워크숍을 앞두고 L이 돌연히 그 프로젝트 계획을 부서 전체에 알리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해왔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그 프로젝트가 부서 전체에 미칠 영향이 꽤 컸기 때문에 미리 사람들에게 알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러자,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대충 내가 만든 기획서와 자신이 하던 걸 짜깁기 한 프레젠테이션이 준비되었다. 그것도 전날 오후 5시가 넘어 확인해 보라며 보내왔길래 또 저녁 늦게까지 남아 확인하고 너무 짜깁기 한 티가 나지 않도록 조절하고 다듬어서 보내줬다.
그리고 행사 당일. 그 일정을 어떻게 소화할 건지 물어도 뱅뱅 돌리며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길래 일단 기다렸다.
순서가 돌아오고… 하하하. 의도적인 건지 뭔지. 그는 원맨쇼로 그 일정을 진행했다.
이게 무슨 기분이냐면. 그래, 대학 때 조별 과제할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다. 열심히 자료 수집해서 발표 준비 다 해서 보내줬더니 지 혼자 한 것처럼 냉큼 먹어버리는 그런 얌체를 눈앞에 둔 기분. 그렇다고 팀원들 앞에서 티 낼 문제는 아니라 잠자코 있다가 그도 대답 못할 질문에 답을 하며 일단 쇼를 마무리했지만.
기분이 언짢았다.
H가 내년에 있을 resource planning을 위한 계획서를 우리에게 보내왔다. 연말이 다가오기 때문에 빨리 처리해야 할 문제였고,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계획서를 업데이트 한 뒤 그를 포함한 전체에게 답을 보냈다. 그러자 D 역시 답을 보냈다. 그런데 계획서는 건드리지도 않고 쓸데없는 잡담만 써놓았다. 아니, 쓸데없는 잡담이라기보다 전에 있었던 그 연말 발표를 언급하며 ‘너희가 아주 괜찮은 발표를 하는 바람에 나만 좀 모자라 보였다.’라는 말과 함께 다른 진행자의 흉도 스쳐 지나가는 척 끼워 넣은 이메일이었다.
사람 좋은 H는 그 메일에 “I think we did all well, and D, you were very honest at the session too”하고 아주 영국인스러운 답을 써서 보냈다. 나 같으면 그 뒤에, ‘그래서 계획서는?’하고 물었을 것 같은데.
L과 D는 수시로 자신들이 얼마나 바쁜지, 특히 비슷한 분야인 L은 자꾸만 틈이 날 때마다, “yours is not as big and complicated as mine” (네 프로젝트는 내 것만큼 크거나 복잡하지 않지) 따위의 말을 한다. 솔직히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이런 입싸움이 도대체 무슨 소용인가 싶어 보통은 그냥 대꾸 없이 넘어간다.
그렇다고 이 사소한 것들이 내 신경을 건드리지 않는 건 아니다.
꼴랑 두 달이다.
그런데 벌써부터 자꾸 사내 정치판으로 끌어당겨지는 기분이다. 눈치싸움이 이전보다 더 치열해지고, 징을 맞진 않지만 옆에 나란히 선 못들이 눈치 주는 게 더 잘 느껴진다.
뭐, 새로운 도전이라면 새로운 도전이겠지. 이번 크리스마스 휴가는 멘털 관리를 위해 써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