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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Mar 27. 2022

헤드헌팅 당하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어라, 이런 연락도 받아보네, 하는 생각에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대화나 해보자 싶었다. 


줌을 통해 만난 남자는 영상으로 보는데도 Londoner 특유의 말쑥하고 세련된 세일즈맨의 분위기를 풍겼다.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면서 헤드헌터는 이쪽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요리조리 대화를 주도하며 내가 자신이 찾는 사람인지 확인하려는 질문을 이어갔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설명해주고 이어지는 질문에 대답을 하고 나니 다행히 내가 팔 만한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이력서를 보내줄 수 있냐는 부탁과 함께 괜찮으면 채용공고를 낸 회사의 예비 상사와의 가벼운 만남을 주선해주겠다는 소릴 했다. 


뭐 여기까지도 일단은 호기심이 90%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이 10% 정도였다. 헤드헌터는 Job description은 물론 회사에 가능한 것도 정리된 메일을 보내줬고, 일주일 안에 예비 상사와 약속을 잡아줬다. 


아무래도 이직해야겠다는 절박한 마음이 없어서였는지 (사실 지금의 자리로 승진한 지 고작 5개월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긴장하지 않고 맞이한 예비 상사와의 인터뷰는 무난하고 친근한 분위기로 흘러갔다. 그렇게 통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드헌터가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다음 과정으로 진행해도 괜찮겠냐는 요청을 해왔다.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그렇게 채용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갔다. 인성 테스트도 하고, 최고 보스와도 일대일 면접을 하고, 또 예비 보스와 통화를 하고. 마지막으로 4 대일의 패널 인터뷰까지 마쳤다. 그러는 동안 한번 옮겨볼까 하는 마음은 10%에서 천천히 40, 60% 정도로 커져갔고. 


그리고 마지막 인터뷰를 마치고 이틀 후 들뜬 목소리로 헤드헌터가 연락을 해왔다. 


"I received an offer for you"


그제야 정신이 확 들었다. 한번 올라가 볼까, 하고 계단을 하나하나 올라가다가 갑자기 '도착했습니다!'라는 안내 방송을 들은 기분이랄까. 어, 나 진짜 여기까지 왔네? 싶었다. 거기다 눈앞에 실질적인 연봉 액수가 떡 하니 나타나자 그제야 실감이 났다. 


아. 결정해야 하는구나. 


대략 1주일 정도 고민한 것 같다. 일단 Financial Advisor에게 연락해서 꼼꼼하게 득과 실을 따졌고, 그를 바탕으로 연봉 협상을 했다. 연봉 협상 다음에는 첫 출근 날짜 협상을 했고, 그 외 자잘한 입사 과정에 대한 중재가 이루어졌고..... 계약서에 사인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도 기분이 좀 얼떨떨하긴 하다. 일단 그동안 내가 했던 모든 취업과 이직은 내가 스스로 발품 팔아서 알아보고, 지원하고, 떨어지고, 피드백받고, 수정하고, 또 지원하고, 떨어지고, 또 지원하고, 뭐 그런 식의 과정을 거쳐서 이뤄왔던 거라서, 이렇게 내가 먼저 나서지도 않았는데 떡하니 이직의 기회가 주어졌다는 사실이 아직도 어색하고. Public sector에서 다시 Private sector로 이동한다는 사실에 설레면서도 떨리고... 


그래도 나름 신선한 경험을 해봤기에 혹시라도 이런 비슷한 경우를 겪는 분들이 있을까 봐 작은 깨달음을 나누자면... 


- 어떻게 헤드헌터에게 연락받았나?


L...In이라는 비즈니스 전문 소셜미디어 플랫폼을 통해 연락이 왔다. 내 프로필을 보고 이런 자리에 맞을 것 같다며 직업 타이틀과 연봉대를 말하며 헤드헌터 쪽에서 먼저 개인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실 이곳 외에서도 몇 군데 다른 헤드헌터들이 연락을 해왔긴 했는데, 제안하는 자리가 나와 전혀 맞지 않거나, 근무지나 조건이 확실히 아닌 곳은 미리 거절을 했었다. 


어쨌건 혹시 이런 쪽의 기회를 노린다면 자신의 프로필을 제때제때 업로드하도록 하자. 솔직히 난 소셜미디어 자체를 참 게으르게 하는 편이긴 한데 (브런치에 글 올리는 빈도수만 봐도 짐작하시겠지만;;;) 그래도 직책이 바뀌거나 직업이 바뀔 때마다 한번 날 잡아 프로필을 업데이트하곤 한다. 단순히 직업 타이틀만 바꾸는 게 아니라, 내가 하는 일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써놓고 요약 프로필 같은 것도 바꾸는 등, 전체적인 업데이트를 하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open to work'라는 항목에 클릭해 놓는 걸 잊지 말자. 이직에 관심이 있다는 표현으로 내 connection인 사람들에게는 공개적으로 보이지 않지만, 아무래도 recruiter에게만 따로 보이는 항목인 거 같다. 


- 모든 건 헤드헌터와 결정해야 하나? 


다들 알고 있겠지만, 헤드헌터는 중개수수료를 받고 채용하려는 회사와 지원자를 중개해주는 역할을 한다. 즉, 그 사람 입장에서는 자신이 추천한 사람이 채용이 되어야 수수료를 받기 때문에 당연히 지원자를 도우려고 한다. 그런 의미로 초반이 좀 편하긴 했다. 헤드헌터가 알아서 시간도 조정해주고, 다음 일정도 알려주고, 인터뷰어에 대해서도 알려주곤 했으니까. 


그러다가 최종 오퍼가 나오고 연봉 협상을 할 때 나 같은 경우는 헤드헌터와 마찰이 있었다. 그 사람 입장에서는 고지가 눈앞에 보이니 나더러 초반 오퍼가 얼마나 좋은 딜인지 열심히 설명하며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그게 내 입장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는 그게 그렇지 않다고 설명하려 했는데, 어느 순간 그는 조급함을 드러내며 '그럼 얼마면 되는데?' 뭐 그런 소리까지 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그때부터 난 바로 채용 담당자와 연락을 취했다. 내 일에 대한 결정을 중개자의 의견에 휘둘려서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니 혹시라도 헤드헌터와 입장이 틀어지면, 이직하려는 회사의 채용 담당자와 직접 대화해보자. 그랬는데 채용 담당자의 태도가 헤드헌터와 다르지 않다면, 그때 이직을 재고해봐도 늦지 않으니. 어차피 이직해서 일해야 하는 건 나지 그 헤드헌터가 아니니까. 


- 연봉 협상은 이직 전에 해야 한다. 


보통 채용하려는 회사는 가능한 저렴하게 사람을 사고 싶어 한다. 기본급을 주려고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대충 정해진 연봉선이 있어도 가능하면 그 최저선에 맞는 연봉으로 사람을 들여오고 싶어 한다는 소리다. 그러면서 말한다. 우리는 모든 피고용인에게 자기 계발의 기회를 주고, 보너스 등을 통해 연봉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은 많다고. 그러니 일단 우리가 제안하는 연봉으로 받고 들어와서 시작하자고. 보너스까지 치면 실수령 연봉은 그것보다 훨씬 많을 거라고. 


나 역시 이런 제안을 초반에 받았는데, 내가 취한 입장은 보너스는 어디까지나 '보너스'이지 고정수입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금전 계산을 그 보너스를 빼고 한 뒤 연봉을 협상했다. 그리고 알아야 할 건 보너스로 나오는 % 는 보통 최고선이고 (예. 최고 20% 연간 보너스), 그 % 는 내 기본 연봉을 바탕으로 계산된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보너스 %를 줄이고 그만큼 연봉을 올렸다. 솔직히 보너스는 내 실적에 따라 올리는 게 가능하지만, 연봉을 재조정하는 건 그보다 더 힘들 것이기 때문에. 


- 이직할 때는 연봉만 고려해서는 안된다. 


솔직히 초반에 제안받은 연봉은 현재 내가 받고 있는 것의 삼분의 일 이상이 오른 금액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그 금액을 거절한 까닭은 단순히 돈을 좀 더 많이 받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연봉 뒤에 숨어있는 Added value benefit의 가치를 계산했을 때 그 연봉 인상만으로는 실제 이득이 별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하고 있는 영국 공무원의 연봉에는 따로 보너스가 들어가지 않는다. 인플레이션에 맞춰 매해 올라가지도 않는다. 고작 올라봐야 1% 정도다. 대신 Civil Service Pension (연금)에 넣어주는 돈이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Sick pay 역시 Private sector에 비하면 아주 관대하다. 야근 수당은 안 줄지 몰라도 그걸 시간으로 바꿔준다. 그만큼 월차 일수가 늘어난다는 소리다. 


그런 걸 금전적인 가치로 다 환산하면 연봉이 얼마 올랐다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게 된다. 그러니 연봉만 따질 게 아니라 이런저런 숨겨진 혜택의 금전 가치까지 다 따져보고 결정하자. 그리고 그 차이가 가지고 오는 일상생활에서의 변화도 생각해 봐야 한다. 공공기관에서는 현재의 안정을 바탕으로 비슷하게 안정된 미래를 약속해주지만, 사기업에서는 안정된 미래라기보다 현재의 보상을 더 크게 주는 대신 리스크도 높은 편이니 말이다. 




이직 날짜까지는 아직 몇 달이 더 남았기 때문에 새로운 직장에 대한 이야기는 여름 후에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번에 옮기면 Private sector > Eucation > Public sector > Private sector로 돌아가는 순인데 사회 초년생일 때와는 또 어떤 다른 경험을 하게 될지 기대되네요. 


이직을 좀 자주 하는 거 아닌가 싶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본인의 가치를 높이고 싶으면 내부에서 증명해 올라가는 것보다 내 현재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딱히 불안하다는 생각은 안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긴 합니다. 떠나야겠다고 결심을 한 뒤 얻게 된 이직의 기회가 아니란 것도 이 감정에 한몫하겠지요). 전에도 말했듯이 평생직장 혹은 완벽한 직장을 찾기보다 그때그때 내 상황에 맞는 최적의 직장을 찾아 메뚜기처럼 뛰어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로 다른 도약을 준비하시는 모든 메뚜기분들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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