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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Feb 11. 2022

얌체 같은 동료와 바보 같은 나

동료 P는 휴가를 가기 위해 일한다는 말이 참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한 해가 시작할 때 일단 휴가 계획부터 짜고 보는 사람이고, 모든 기념일을 챙겨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나쁘지 않다. 인간적으로는 꽤 좋아하는 편이다. 아마 친구로 만났다면 꽤 잘 맞았을 거란 생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안타깝게도 '동료'로 만났다. 그것도 같이 일을 분담해야 하는 입장으로. 


보통 업무 분담 때문에 누군가 월차나 장기 휴가를 낼 때면 같은 Grade의 동료들과 직속 상사, 직속 부하직원들에게 Calendar invite을 보내는데, 아니나 다를까 올해 시작과 동시에 그는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다양한 목적지가 적힌 휴가 계획을 보내왔다. 그 자체로 나쁘진 않았다. SLT (Senior Leadership Team) 멤버가 동시에 휴가를 가는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에, 사실 이렇게 먼저 선점하는 게 휴가 계획을 잡기에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하니까. 


그렇게 P는 1월 중순에 브라질로 12일간의 휴가를 떠났다. 그런데 딱 그때부터 일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가 떠나고 딱 하루 뒤, 그의 소속인 팀 한 군데에서 담당하고 있던 프로젝트 하나에서 보안 문제가 터졌다.  


금요일 11시 50분에 그 사실을 통보받았고, 12시 30분에 Director General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P도 없었고, 우리의 보스도 월차를 내고 없었기 때문에 내가 대표로 불려 갔고, 그 회의가 열리기 전 40분 동안 나는 미친 듯이 전화를 돌리며 상황을 파악했다. 긴급회의가 열린 이유는 DG가 이 일에 대해 더 신경 써야 하느냐에 대해 결정을 내리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회의 자체는 무난히 잘 끝났다. 


다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보안 문제가 한 번 터지면 그때부터는 피 터지는 시간 싸움인데, 하필 금요일이라 월차를 낸 사람도, 일찍 퇴근한 사람도 많았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그 동료 혼자 처리한 일들도 많아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는 게 더 힘들었다. 


그렇게 금요일이 지나가고 그 다음 주 수요일까지 미친 듯이 일이 몰아쳤다. 물론 그 사이 내가 해야 하는 업무들도 차곡차곡 쌓여 가고 있었고, 그 동료의 업무까지 내 접시 위에 은근슬쩍 끼어들기도 했다. 그렇게 한 주가 지났다. 


월요일에 동료가 돌아왔다. 여행 때 얼마나 많은 칵테일을 마셨는지, 브라질의 날씨와 빛나는 모래사장에 대해 얘기하던 동료에게 일단 미소 지어줬다. 이제 돌아왔으니 피곤하겠지. 그래, 이제 천천히 발란스 좀 맞춰보자. 


화요일에는 SLT전체 워크숍이 있었다. 온라인상이 아니라 오프라인상으로 열렸기에 아침 7시도 되기 전에 집을 나섰다. 워크숍은 9시부터였고, 거기서 가장 먼 곳에 사는 내가 회사차를 렌트해서 다른 두 명의 동료를 픽업해서 데리고 가기로 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만난 P는 런던에서부터 운전을 하고 오느라 아주 피곤하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는 꽤 피곤해 보였다. 워크숍은 오후 4시가 넘어 끝났고, 다른 동료들을 다 데려다주고 늦은 저녁 집에 도착해서 메시지를 확인해보니 P가 단톡방에 사진 하나를 올렸다. 바로 코로나 바이러스 양성 반응이 나타난 테스트 결과. 


P는 바로 런던으로 돌아갔고, 그 후 1주일 동안 병가를 냈다. 


1주일 만에 돌아온 P가 한 일은 또 다른 휴가를 잡은 거였다. 이번에는 독일로 가시겠단다. 자기 파트너의 생일 파티 때문에. 2주 반 동안 사라져 있다가 딱 3일을 일하고 또 휴가를 가셨다. 


그걸 보는데 솔직히 화딱지가 났다. 아니 이 X가! 하는 욕이 절로 나왔다. 


P가 코로나 바이러스 양성 검사가 나오고 며칠 뒤에 다른 동료 역시 코로나 양성 검사가 나왔다며 병가를 냈다. 안 그래도 일손 딸려 죽겠는데, 다른 SLT 멤버 한 명은 아무래도 주의해야 할 것 같다며 일하는 시간을 줄이겠다고 했다. 


와. 


그렇게 누군가는 휴가를 가고, 병가를 내고, 생일파티를 위해 사라진 시간 동안 난 뭘 했지? 일했다. 하루에 정해진 근무시간이 7.24 시간인데 8-9시간은 기본이요, 어느 날은 11-12시간을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며칠 전. 아침에 눈을 떴는데 극심한 허리 통증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걸을 수도 없고 앉을 수도 없었다. 그래도 일해보겠답시고 침대에 누워 랩탑을 켰다. 400통이 넘어가는 이메일을 보는데 참 막막했다. 빽빽하게 들어찬 스케줄을 보다가, 보스에게 메시지를 날렸다. 


몸이 안 좋다고. 당장 병가 내고 쉬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도 랩탑을 바로 끄지 못하고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빨갛게 마크된 이메일들이 수두룩 빽빽했다. To do 리스트도 꽉 찼다. 


가만히 그것들을 노려보다가 랩탑을 껐다. 그리고 하루 종일 진통제를 먹고, 소염제를 바르고, 찜질팩을 얹고서 하루를 보냈다. 


내가 병신 같았다. 도대체 무슨 영웅 나셨다고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일을 했나 싶었다. 누군가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뛴다고 딱히 월급이 더 나오는 것도, 대단한 칭송을 받는 것도 아닌데. 혼자만 죽어라 뛰어봤자, '자, 이제 쉬어'라는 말보다, '잘 뛰네, 그럼 이 길로도 뛸 수 있어?' 하며 일을 더 받을 뿐인데. 


대충 뛰는 건 아무래도 성격과 안 맞아 못하겠지만, 적어도 내 주제는 알고 적당히 뛰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에 대한 과대평가 따윌 해서 내 몸을 괴롭히지 말고, 괜한 영웅 심리에 사로잡혀 혼자 다 짊어지려 하지도 말고. 


그러다가 남는 에너지는 쓸데없이 남 일 해준다고 쓸게 아니라 나한테 온전히 퍼부어줘야지. 어차피 끝까지 갈 건 나 자신이고 내 몸뚱이인데. 아프지 말자.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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