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토리 Sep 19. 2022

[영국 직장] 그 영문장의 뜻

어느 날 일이 하나 터졌습니다. 세일즈 팀에서 연락이 급하게 오더니 이런저런 일로 고객 회사 (Client)가 문제를 제기했다며, 이 일이 당장 수습되지 않으면 계약이 파투 날 거란 소식을 전했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뭔지에 대해 세일즈 팀원에게 간략히 전해 듣긴 했지만, 사실 당신이 이 회사에 취직하기 전의 일이라 당신은 그 일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모릅니다. 그래서 일단은 위의 상사에게 이 문제를 보고했더니, 상사는 당신의 말을 듣고 있다가 요청했습니다. 


"Can you find out what's causing the problem please?"


이 간단한 문장이 당신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당신은 이제부터 뭘 해서 어떤 대답을 제출해야 하는 걸까요?  


혹시 저 말을 듣고, 상황 파악을 열심히 한 뒤 보고서를 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의미를 반 정도 파악한 겁니다.  


만약 저 말을 듣고 나중에 상사가 당신을 다시 불렀을 때, 당신의 대답이, 


"I asked X to find out, I checked Y and it seems that nobody knows as..." (X에게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봤고, Y도 확인했지만 누구도 자세한 내막은 몰랐습니다, 왜냐면...) 


이런 종류의 것이라면 당신의 상사는 아마 침묵할 겁니다. 원하던 종류의 대답이 아니기 때문이죠. 그럴 경우, 당신의 상사는 이렇게 반문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So, what's causing the problem?" (그래서 뭐가 문제인 거죠?)


당신 입장에서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건지 상황을 파악해서 설명했다고 생각했을지 몰라도 상사의 입장에서 궁금한 건 그게 아니니까요. 


그럼 당신이 모든 상황을 파악해서 육하원칙에 맞는 보고서를 5페이지 넘게 채워서 제출했다고 합시다. 그 후 상사와 미팅을 합니다. 상사의 성격에 따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그 상사의 직급이 높을수록 그 사람은 또 똑같이 질문할 겁니다. 


"So, what's the problem?"


그럼 속으로 '야, 내가 다 써서 제출했잖아! 읽어보라고!' 하는 욕이 저절로 나오겠죠. 그래도 꾹 참고 보고서에 쓴 걸 말로 설명하고 있다 보면 좀 성격 급한 상사는 당신의 말을 자르고 이렇게 물을 겁니다. 


"So, what do we have to do?" (그래서 뭘 해야 하는데?)


그 순간 당신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하는 표정으로 당신의 상사를 바라본다면, 아마 당신의 상사는 또 침묵하면서 당신을 쳐다볼 겁니다. 자세한 상황을 파악한 보고서조차 상사가 원하던 답이 아니었기 때문이죠. 


그럼 저 처음의 문장이 지시한 내용은 무엇인가? 


정답은 상황 파악해서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요점을 정리하고, 그 문제가 가지고 올 여파에 대한 Risk를 분석하고,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조치 몇 가지와 그에 해당하는 장/단점 (Pros/cons or impacts/risks)을 정리해서 보고해라, 라는 소립니다. 


비유하자면, '지금 쌀이 없어 밥을 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누가 문제 제기를 했을 때, 당신더러 지금 창고에 있는 모든 식재료를 파악해서 당장 만들어 낼 수 있는 요리를 몇 가지 생각한 뒤 그 내용을 보고하란 소립니다. 당신의 상사가 '그럼 이 요리를 하게'라고 결정을 바로 내릴 수 있게 말이죠.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직장 상사가 당신에게 연락을 해서 A 프로젝트에 대해 묻습니다. 당신 팀이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이기 때문에 대충 진행 상황 정도를 알립니다. 말을 듣고 있던 상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합니다. 


"We need to do Z by today. Can you sort it out please?"


공교롭게도 그 일을 담당하고 있는 당신의 팀원 C는 휴가 중입니다. 그럼 이 상황에서 뭐라고 답하는 게 좋을까요?


정직하게, 그 일은 C가 담당하고 있는데 현재 휴가 중입니다. C가 돌아오면 바로 처리하라고 하겠습니다, 혹은 오늘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라고 할까요? 


직장 생활해보신 분들은 대부분 짐작하시겠지만, 저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대부분 정해져 있습니다. 


"Sure, leave it with me." (당연하죠, 제게 맡겨주십시오) or "Yes, no worries. I will sort it out" (네, 걱정 마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럼 상사는 웃으며, "Thank you"하고 물러날 거고 당신은 꽁지에 불붙은 듯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을 해결하느라 남은 근무시간이 엉망이 될지 모르지만 그래도 정답은 저거밖에 없습니다. (흑흑...)


그 외에 문제가 터져서 부서 몇 군데가 휘말리고 난리가 난 다음에 일이 해결되었다고 칩시다. 일이 해결되었는데도 위의 누군가, 혹은 상사가, 


"I'd like to understand why it happened"


라고 묻는다면, 그땐 긴장해야 합니다. 상황 파악을 하겠다는 게 아니라 책임을 추궁하겠다는 말이니까요. 


그러니 혹시라도 당신의 일이나 당신이 담당하고 있는 팀에 조금이라도 문제 될 게 있었다면 저 말이 나온 즉시 잘못을 인정하고 앞으로는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뭘 어떻게 하겠다는 방지책을 내놔야 합니다. 




영국에서는 직장 생활할 때도 말을 직접적으로 안 하고 돌려하는 경우가 꽤 됩니다. 행간의 의미를 파악해서 업무 처리를 해야 하고, 직장 상사들도 업무 처리에 대한 평가를 바로바로 내리지 않기 때문에 상사와 부하직원이 동상이몽을 꾸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보고서를 제출했을 때, 영국에서는 그 보고서가 아무리 엉망이라도 상사가, "이걸 보고서라고 가지고 온 거야!"하고 직접적인 피드백을 하진 않습니다. 대신, "Can you..."하고 수정 사항을 지시하죠. 

수정 사항이 반복될 때 부하 직원은 '도대체 뭘 어쩌란 거냐!'하고 답답해지고, 상사는 '이런 것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어느 순간 상사는 속으로 그 직원의 업무 능력에 대한 판단을 내리고 더 이상 관련 업무를 맡기지 않는 상황도 생깁니다. 


어떤 상사는 수정 사항을 지시하는 대신, 아예 미리 그 사람을 포기하고 다음 타자에게 넘기기도 합니다. 그러니 만약 당신에게 내린 업무를 상사가 당신의 동료에게 맡기고, "No worries, R will do it."라고 한다면 일을 덜었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긴장해야 합니다. 특히 당신이 "Why?"라고 묻거나, 또 한 번의 기회를 달라고 요구했을 때, 상사가 말을 얼버무리거나, R이 더 적합해서, 혹은 경험이 많아서,라고 답하면 이미 그 상사의 머릿속에 당신에 대한 어떤 판단이 내려졌단 소리니까요.


영국에는 겉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건 프로페셔널하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상황 파악을 상대방의 표정이나 행동만 보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말투 역시 늘 정중하기 때문에 그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면, 뒤통수를 맞은 줄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병원에 실려가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직장 상사가 다음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면,  


"That's not good enough." (특히 업무나 성과와 관련해서)

"It's not acceptable" (주로 업무 처리/해결 속도와 관련해서)


그때는 상대방이 아주 깊이 빡쳐 있고, 그 열받음이 축적되었다가 터져 나왔다고 보는 게 좋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그대로 문장에 녹아 나왔기 때문이죠. 혹시라도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당장 대책을 마련해서 결과를 내 보여야 합니다. 덩달아 배 째라, 할 게 아니라면 말이죠. 


너무 뻔한 말들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쓰고 있는 이유는 사회 초년생인 영국인들도 하고 있는 실수이기 때문입니다. 


의욕만 넘치고 요령은 없는 햇병아리, 혹시라도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봐 모른다는 말로 발을 빼기 급급한 햇병아리, 말을 문장 그대로만 받아들여서 딱 그만큼의 일만 하는 햇병아리 등등. 거기다 제 '동양인' 외모만 보고 각 재기 하는 햇병아리까지 보게 되면 허허, 그저 웃게 됩니다. 


그 햇병아리들에게 열받아서 글을 쓴 의도, 혹시 들켰나요? ^^;;

매거진의 이전글 새직장에 적응합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