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Baptism of Fire라는 표현이 있다.
원래는 성경의 한 구절에서 나온 말인데, 직역을 하면 불의 세례, 정도가 되겠지만 직장 생활할 때는 말 그대로 아주 화끈하게 불에 타면서 일을 배워가는 과정을 표현할 때 자주 쓰인다. 요즘 누가 내 직장 생활 적응에 대해 물으면 ‘롤러코스터’와 함께 내가 가장 많이 쓰는 말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사기업으로 옮긴 지 이제 5개월 정도가 되었다.
그동안의 과정을 살펴보자면, 처음에는 의욕 충만한 시기가 있었다. 모든 게 새로웠고, 회사 성격/분위기 파악, 얼굴 도장 찍기에 중점을 뒀던 시기였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가니 혼돈의 시기가 찾아왔다. Acronym (줄임말)이 어찌나 많은지 리스트는 밑도 끝도 없이 늘어났고, 그래도 못 알아듣는 말이 많아 회의 중에 정신줄을 놓을 때도 있었다.
거기다 일 관련된 메일도 슬슬 들어오길래 업무를 살펴봤는데. A와 B product 라인만 책임지면 된다더니,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서 파생된 라인, 옛날 라인, 이름만 바뀐 라인, 합병인수로 이쪽으로 넘어온 라인 등등 판도라의 박스처럼 뭐가 끊임없이 튀어나왔다.
사람들은 다들 차차 익숙해질 거라며 처음에는 토닥토닥거려줬지만, 내 이름이 시스템에 뜨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일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일단 뛰어야 했다.
내가 초행길이라고 기차가 날 위해 잠깐 멈춰주는 게 아닌 것처럼, 회사는 여전히 돌아가야 하니까.
그러다 보니 이제는 세세한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어떤 기분이냐면, 새로운 집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그 사실 만으로 신기해서 감탄하게 되지만, 좀 익숙해지면 낡은 벽지도 눈에 띄고, 욕실 천장의 곰팡이도 눈에 보이고, 수압이 별로 안 좋다는 것도 눈치채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중 가장 고민스러웠던 건 단연코 사람 문제였다.
어떤 시간대에 워낙 반응이 없어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줄 알았던 팀원이 사실은 풀타임이었고, 앞에서는 ‘Sure, no worries, I will do it’하고 흔쾌히 말하던 팀원이 사실은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란 걸 알게 된 거라거나, 의욕 충만해 보이던 팀원이 사실은 기본 보고서는커녕 아직 엑셀에도 서툰 초짜였고…
공무원 생활을 할 때도 당연히 이런 종류의 문제를 겪긴 했지만, 초반에 대규모 구조조정을 거치면서 물갈이가 다 되었기에, 후에는 내 손으로 직접 사람을 뽑고 팀을 꾸리면서 어느 정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공무원 조직에서는 일보다 사람을 중하게 여기는 분위기가 있어서, 그 사람이 일을 잘 못하면 아예 업무를 적게 주거나 프로젝트에서 배재시키는 등 빨리 포기하면서 해결하기도 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사람이 중한데 왜 그 사람을 빨리 포기하는 게 해결책이냐, 하고 물으실 수도 있는데, 영국 회사에서는 사람들이 일이 힘들면 참지 않고 ‘일이 많아서 너무 힘들다. 내 정신 건강에 해롭다’라고 대놓고 불만을 표출하거나 수틀리면 병가를 내면서 잠수 타는 사람들이 꽤 많다.
공무원 조직은 업무의 효율성보다 어떻게 보면 밖으로 보여주는 사회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분위기가 강해서, 이런 불만이 나오는 게 프로젝트를 제때 마감하지 못했다는 것보다 더 크게 지탄받는 요소가 된다.
그러다 보니 그런 불만이 나오면 아예 그 사람의 업무량 자체를 줄이거나 그 사람을 프로젝트 자체에 투입시키지 않으면서 불만이 나올 요소 자체를 없애버린다. 그럼 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적어도 일 때문이라는 소리는 나오지 않게 될 테니까.
그럼 같은 직장 다니면서 그 사람의 편의만 봐주는 거 아니냐, 그 일을 나눠야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 아니냐, 하고 말할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 그 사람에게 승진이나 다른 보상의 길은 다 끊기는 거라고 보면 된다. 이만큼 편의를 봐줬는데도 일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온다? 그때는 바로 그 사람을 팀에서 쫓아낼 손절각을 찾게 되는 거고.
물론 이건 공무원 세계의 일이고, 당연히 사기업에서는 통하지 않는 소리였다. 모든 게 숫자로 환산되어 돌아가는데, 월급을 받아가는 사람이 그에 합당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당연히 다른 어딘가에서 그 무게를 견뎌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불만이 나오지 않으래야 않을 수가 없다.
그런 까닭에 시간이 지나자 슬금슬금 그런 불만의 목소리를 내게 전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외부 통틀어서 말이다.
그러면서 답답함과 짜증의 시기가 찾아왔다.
고객은 기다리고, 요리는 해야 하는데, 물고기는 요리조리 피해 도망가고, 요리사는 불 조절을 못하고, 요리법도 모르고, 보다 못해 그럼 일단은 내가 할 테니 조리도구를 내놓으라니까 도마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칼은 녹슬었고, 재료를 가지고 오랬더니 아예 재배를 하러 간 건지 소식도 없고..
그러는 와중에 고객은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며 내게 불만을 토하고. 그 말에 주방 식구들은 저 고객이 얼마나 진상인 줄 아냐며 화를 내고.
진짜.. 그럴 때는 화도 안 나고 헛웃음만 나왔다.
‘ㅎㅎㅎ 개판이네’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다.
문제는 아무리 사사로운 (!) 시비가 있더라도 음식점 문을 닫을 수는 없다는 거다. 음식점도 사실은 거대한 열차 안에 속해진 부분이니까. 일 하기 싫다고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릴 게 아니라면 우리는 매일 좋든 싫든 결과를 내야 하고, 그 결과가 열차를 돌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니까.
그래서 지금은 2인 3각 달리기 시기를 겪고 있다.
좋든 싫든 팀을 어떻게든 묶어서 같이 달리는 시기 말이다. 우리는 잘할 수 있다고 구호를 외치기도 하고, 묶는 방법을 바꿔보기도 하고, 힘들다며 뻗은 이들에게 너의 장점은 이것이니 조금 더 자신을 가지라며 기운을 북돋아 주고, 자꾸만 발이 엇나가는 이들에게는 발을 이렇게 움직이는 게 어때, 하고 조심스레 조언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위아래에서 이건 왜 이러냐고, 이런저런 업무가 몰려올 때면 소리치고 싶어 진다.
"야! 나 입사한 지 고작 몇 개월이라고! 여기서 몇 년을 구른 너희가 그걸 나한테 묻는 이 상황이 이상하지 않아?!"
하고 말이다. 그렇게 며칠 스트레스를 받아 머리를 뜯고 있는데 남편이 그랬다.
"That's why they brought you in" (그러니까 널 데려왔지)
그 소리를 듣고, 통장에 꽂힌 숫자를 보면 분통이 터지다가도 다시 이를 악물고 일을 하게 된다.
그렇게 일만 한지 벌써 5개월 정도다.
예전 공무원 생활을 할 때도 업무량에 시달린다는 소리를 한 것 같은데, 지금은 초반인데도 매일이 아주 다이내믹하다. 거기다 회사가 글로벌해서 호주/뉴질랜드 쪽과 아침 7시에 회의를 하고, 미국 쪽 회사와의 회의를 위해 저녁 7시에 다시 로그인해야 할 때도 있다.
최근에 아이들이 내게 말했다.
"You work too much. Why don't you change your job again?"
하하하.
웃음밖에 안 나왔다.
그러게, 이대로면 정신이 나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