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ck off!
내 직속 상사인 U는 소위 말해 이 회사에 뼈를 묻을 예정인 사람이다.
사회 초년생으로 이 회사에서 처음으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회사의 주요 부서에 자리가 날 때마다 악착같이 달려들어 승진을 거듭해 지금의 임원 자리까지 온 사람이다.
야망 있고, 에너지도 넘쳐나고, 무엇보다 이 회사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 굳건하다.
십몇 년의 시간을 오로지 이 회사에만 투자했기 때문에 전문성이야 말할 것도 없고, 이 쪽 업계에 나름 이름도 알려져 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고, 다른 임원들에 비하면 상당히 젊은 축에 속하며, 회사폰과 개인폰의 구분도 두지 않고, 휴가 중이라도 회사일에 관한 것이라면 언제든 전화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
회사 초창기부터 있었던 사람인만큼 회사 내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잘 없을 정도며, 정치적 수완도 대단해서 최고 경영진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다.
내가 이제껏 몇 번의 이직과 커리어 변화를 통해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경험을 쌓아왔다면 내 상사는 그야말로 외골수로 한 분야만 깊고 정밀하게 판 케이스다.
그런 실력자를 상사로 둔 건 꽤 좋은 일이라 할 수 있다. 일단 상사를 따라 나도 윗선에 눈도장 찍기 좋고, 걸어 다니는 아카이브라서 회사일에 관한 거라면 웬만한 건 뭐든지 알고 있으니까 일 해결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런 상사와 일한 지 이제 7개월쯤 넘었나? 나는 요즘 들어 그토록 대단한 내 상사의 업무 방식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나는 달릴 테니 알아서 쫓아와"
내 상사는 업무의 효율성과 결과를 중요시한다. 회사와 팀 운영에 있어 기본적인 우선순위이니, 그건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녀가 바로 그 효율성과 결과‘만’ 중요시 여길 때다.
그녀는 회사 초창기, 인력이 부족하던 시기부터 혼자 발품을 팔아 이루어낸 거래들로 회사에 인정을 받아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자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혼자 일하고 생각하고, 직접 처리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효율적인 직원의 자세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그녀는 혼자 발품 뛰던 직원이 아니다. 그녀 밑에는 엄연히 다른 팀장/부장들이 존재하고, 그들에게도 팀원/부원들이 존재한다. 우리에게도 프로젝트 계획서가 준비되어 있고, 그에 따른 일의 분배가 있으며 마감 일정표가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계획을 세워 일을 분배하고, 프로세스를 정립해서 체계를 잡아가고 있는데, 어느 날 상사가 뭔가를 툭 하고 던져준다.
‘이거 중요하니까 해결해 봐’, 하고.
중요하다는 그 일은 대부분 그녀가 혼자 회사일을 생각하다가, 혹은 다른 임원이나 다른 거래처와 이야기하다가 떠오른 아이디어일 때가 많은데, 그런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녀는 곧장 행동으로 옮긴다. 여기저기 찔러보고 물어보고, 혼자 이것저것 섞어 반죽 비슷한 걸 만든 다음에 업무량이 많아지면 그제야 아랫사람들에게 해결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거다.
그렇게 난데없이 반쯤 섞다 만 반죽을 받아 들고 나면 좀 당황스러워진다. 도대체 무슨 요리를 어떤 식으로 할 생각이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이게 뭐냐고 물어보면 상사는 빠르게 요점정리를 해준다. 반죽을 이렇게 저렇게 섞어 요리조리 자르고 이런 식으로 구워서 저런 요리를 만들 거다, 그런 식으로. 그럴 때면 ‘소리 없는 아우성’ 게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상상력을 풀로 가동해 그 의도와 최종 결과물을 추축해 내려고 애쓴다.
그 추측물을 이번에는 내가 내 밑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한다. 내가 전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일말의 불안감을 품고서. 그렇게 설명을 한 뒤에도 의문은 따라온다. 지금 이렇게 던져진 아이디어가 도대체 프로젝트의 우선순위 어디쯤에 해당할 것인가. 그러면 또 판을 다 엎고 새로 프로젝트 delivery plan을 짜야 되는 거다.
문제는 그렇게 쉽게 떨어진 반죽형 프로젝트는 또 쉽게 엎어질 수도 있다는 거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소리다. 충분한 의논이나 계획 없이 시작한 일이니 위험부담이 클 수밖에.
그렇게 엎어지고 나면 그것도 아주 캐주얼하게 전달한다. 안 하기로 했으니 폐기하고 원래 하던 거 하라고.
이게 진짜 혼자면 아무 문제가 없다. 혼자 운전하다가 길 잘못 들었네, 하고 다시 돌아가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그녀가 운전하고 있는 건 개인 자가용이 아니지 않은가. 거대한 배가 그녀의 말 한마디에 방향을 틀었다가 다시 원래의 항해로로 돌아와야 한다. 그만큼 낭비된 에너지와 시간이 어마어마하단 소리다.
거기다 따라오는 스트레스는 어떻고.
제발 혼자 가지 말고, 우리도 좀 데려가라고 그러면, ‘뭔가 정해지면 말해줄게 ‘, ’아직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시간 낭비하면서 너까지 끌어들일 필요는 없으니까 ‘, 그러거나, 아니면 한 술 더 떠서 ’ 내가 미리 말을 안 해준 대신 이만큼 반죽을 만들어 줬잖아 ‘하고 말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그냥 답답해지기만 하지, 에휴.
“나는 모든 걸 알기 원해”
내 상사는 자신의 관심이 닿는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끝까지, 온갖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알기를 원한다. 실무자끼리의 회의에도 끼어들고, 메일도 알아서 보내고, 숫자까지 직접 눈으로 보고 계산이 맞는지 확인해야 성이 찬다.
아무리 요약 summary를 보내주고, 이 문제에 대한 답이 이거다,라고 말을 해줘도 믿지를 않는다. 자기가 직접 업무 담당자를 만나서 확인을 받아야 한다.
일을 진행시켜도 이렇게 중간에 자꾸 딴지를 걸고 들어오니, 나중에는 두 번, 세 번 반복해 설명하느니, 그냥 상사가 참여가능한 시간에 회의를 잡는다. 직접 참여해서 들으라고, 그래야 우리도 시간 낭비를 덜하니까.
그런데 임원이 어디 시간 여유롭게 편한 자리인가. 그녀의 일정에 맞추려면 일의 진행 속도가 느려진다. 그러면 효율이 떨어지니 왜 빨리 해결하지 않느냐고, 자신을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말하지만, 솔직히 그 말을 믿고 진행했다가 그녀가 중간에 난입해서 방향이 틀어진 적이 몇 번 있다 보니, 일을 진행시키면서도 우리는 서로 한숨을 내쉰다. 결국 회의의 종착점이 일의 해결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이 상사가 원하는 데로 가고 있나’에 맞춰지는 거다.
이런 식으로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의욕이 아주 녹아서 뚝뚝 바닥으로 떨어진다. 내 업무 능력을 믿지 못하나, 하는 생각도 들고, 이럴 거면 도대체 나를 왜 데려왔나, 싶기도 하다.
“We talked to U, what does U say?”
이것도 참 사람 돌게 만드는 일이다. 워낙 이 회사에서 먹었던 짬밥이 많다 보니 당연히 그녀의 인지도는 물론, 그녀를 향한 의존도도 높다. 그래서 그런지 무슨 일만 있으면 내가 일의 책임자임에도 불구하고 자꾸 내 상사를 들먹인다.
네 상사와 이미 말을 맞췄는데? 네 상사는 뭐라 그러는데? 이런 식으로.
처음에는 이게 내가 이 회사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나를 잘 모르니까 벌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워낙 온갖 것에 발을 수시로 담갔던 상사이니 다른 이들은 아직 그녀가 이 일을 하고 있을 거라 믿을 수도 있지, 아직 사람이 바뀐 걸 모를 수도 있지, 싶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이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위에서 말한 그녀의 업무처리 방식과 연결되어 고질적으로 있어온 문제였다.
뭐든 혼자 결정하고 처리하는 상사. 디테일한 부분까지 다 손을 뻗어야 직성이 풀리는 상사. 자신의 방식과 다르면 중간에 대놓고 직접 나서서 방향을 바꾸는 상사. 회사의 터줏대감인 상사.
그러니 누가 감히 그녀의 권위에 도전하겠는가. 거기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웬만한 프로세스도 몇 칸씩 건너뛰어서 일을 해결 볼 수 있는데.
결국은 그녀 뜻대로 움직이고 그 방식에 맞추는 사람만 살아남게 되는 거다. 그런 식으로 사람이 자주 바뀌면 상사의 문제가 될 법도 한데, 워낙 능력이 출중하고 회사에 중요한 인재이다 보니, 그렇게 못 맞추고 나가버리면 도리어 그건 나간 사람의 문제가 되어 버린다. 덩달아 그녀만 한 사람은 없었다,라는 말 따위를 뒷받침해 줄 근거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녀는 종종 말한다.
“When I was in your position….”
한국에서 소위 말하는 ‘라떼는’ 이야기다. 그녀가 혼자 발품 하던 때와는 회사 규모가 다르고,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아직 흰머리 한 톨 나지 않은 이 상사는 내게 그런 말을 한다.
말로는 워라밸이니 육아니, 가족 관계 같은 걸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 밑에 깔린 전제는 “As long as you deliver” (일만 제대로 한다면)이다. 그녀가 말하는 work ethic은 일을 우선수위로 두고, 일이 급하다면 언제든 달려와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로 판단된다.
나도 솔직히 말하자면 워커홀릭에 가까우니, 그런 말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걸 이해는 하겠다.
그녀가 지나온 발자취를 봤을 때 지금의 그녀가 왜 저런 업무 방식을 가지게 되었는지도 다 이해할 수 있다. 딱히 나쁜 뜻으로 부하직원을 엿먹이기 위해 그러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회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이 넘쳐나서 그런다는 것도 알겠다. 그런 열정과 뛰어난 정치 수완은 확실해 배우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나는 좀 답답하다. 공기가 부족한 작은 방에 갇힌 기분이 든다.
나 역시 내 나름의 커리어를 쌓아 올린 사람이고, 전문성을 갖춘 사람인데, 이건 전 집주인이 자꾸만 내가 새로 이사 온 집에 들어와 참견하는 것처럼 불편하다.
웃기는 건 이런 생각을 나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동료들도 한다는 거다.
‘I sometimes want to tell her to back off’
이게 내가, 우리가 계속 마음속에 품고 사는 말이다.
이제 그만 나 좀 내버려 두고 꺼져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