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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Aug 19. 2023

일하는 요령

프로젝트 회의를 하루 앞두고 팀원 J에게 물었다. 보고서 준비는 잘되어 가느냐고. 

그러자 고개를 끄덕이며 안 그래도 준비 중이라고 했다. 준비 기간이 이틀 반밖에 되지 않아 가능하면 재촉하지 않으려고 알았다고, 막히는 게 있으면 물어보라고 하고 일단 넘어갔다. 


회의 당일날이 되었는데도 보고서가 오지 않길래 늦은 오전쯤에 한번 더 물어봤다. 

이번에는 대답이 없다가 점심시간 이후 회의를 앞두고 한 시간 전쯤에 메신저로 답이 왔다. 

안 그래도 보고서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고. 

나는 그때 이미 다른 회의에 연달아 참석 중이라서 그럼 회의 전에 시간이 되면 연락을 하겠다고 하고, 궁금한 게 뭐냐고 메신저로 물어봤다. 그럼 메신저로 일단 답이라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It's about the report"


선문답 같은 답이 돌아왔다. 그래, 보고서에 대한 건 줄은 알겠으니까 질문이 뭐냐고! 


결국 그 프로젝트 관련 회의가 있기 5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전 회의가 종료되었기에 일단 통화 버튼을 눌러서 물어봤다. 그래서 뭐가 문젠데? 


그랬더니 한다는 소리가..

"I couldn't finish the report"


"why not?"이라는 물음이 절로 나왔는데, 그 팀원이 뭐라 말을 할 틈도 없이 회의가 시작되었다는 알람이 떠올랐다. 최종 보스가 먼저 회의를 시작했으니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고 통화를 종료하고, 화상 회의에 들어갔다. 


불안한 마음을 감추고 일단 프로젝트 진행 상황과 다른 안건에 대해 발표하며 회의를 시작했는데, 보스가 보고서에 대해 물었다. 나는 J가 아직 보고서를 준비 중이라는 말과 함께 그에게 간단한 진행 상황이라도 나눌 걸 요청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건 침묵. 


결국 나는 나서서 안 그래도 J와 이 회의 끝나고 보고서에 대해 의논하기로 했다, 그 후 바로 제출하겠다는 말을 한 뒤 상황을 넘겼다. 


회의가 끝난 뒤, 그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물어볼 게 뭐냐고. 그랬더니 돌아오는 대답이.. 


"I didn't know what to write in the report"


그럼 아예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는 소리 아닌가. 그 말을 듣자마자 순간 어이를 상실하고, 기가 차고, 울컥 화가 나고. 


도대체 그걸 왜 지금에야 말하는 거냐고 물으니 그동안 일이 많았고, 바빴고, 어쩌고 변명을 늘어놓는다. 그 팀 전체의 업무지시를 내리는 게 난데 어디서 씨도 안 먹힐 소리를... 


그래서 그의 업무 목록을 끄집어내다가 왜 이 프로젝트가 우선순위인지 설명해 준 뒤, 결국 쓴소리를 하고야 말았다. 




J는 의욕이 넘치지만 이런 식으로 일을 그르칠 때가 가끔 있는데, 예를 들자면 앞에서는 다 알겠다고 대답한 뒤 나중에 모르는 게 생겨도 묻지 않는다거나, 혼자 해결법을 찾겠다고 시간을 끌다가 결국 막판에 원래 요구된 것과 다른 결과물을 제출한다거나.. 


그를 가만히 지켜보다 보면 의욕은 넘치는데 참 일하는 요령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걸 정리하자면.. 


1. 모르는 게 생겨도 묻질 않는다. 


물어보면 자신이 지시사항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걸 들킬까 봐, 혹은 능력 없어 보일까 봐 그러는 거 같은데, 그래놓고 혼자 끙끙거리다가 이번처럼 시작도 못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에게 조언을 구해 엉뚱한 방향의 대답을 늘어놓는다. 


전자의 경우에는 뭘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르니까 일을 미루다가 미룰 수 없을 때가 되면 이실직고하는 바람에 일의 지연을 야기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왜 이런 보고서가 나왔냐'라고 물으면 그를 도와준 동료의 이름을 팔기 때문에 나는 덩달아 그가 다른 팀원의 시간까지 쓸데없이 잡아먹었다는 걸 알게 된다. 


이럴 때는 전략 회의가 끝난 뒤 대충 보고서의 기틀을 잡아 놓으면 일이 편해진다. 이 보고서는 이런 목적으로 이런저런 내용이 들어가야 된다,라는 요점을 문서 상단에 적어놓은 뒤 짧게 포함돼야 될 내용들을 불렛포인트로 정리해 둔다. 그러면 당장 이 보고서를 작성하지 않아도, 나중에 문서를 열어 시작할 때 큰 도움이 되니까. 


그 후 하나하나 내용들을 써내려 가다가 궁금한 게 생기면 바로 업무 지시자에게 물어보는 게 낫다. 이렇게 궁금한 건 물어보라고 했더니, 진짜 '뭐든' 물어보는 경우가 생기기도 했는데, 이때 물어보라는 건 보통 보고서의 진행 방향, 포함되어야 하는 정보의 범위, 혹은 해당 자료를 찾지 못했을 때의 조언 등등이지. 보고서를 쓰는 법, 같은 게 아니다. 


2. 완벽하려는 시도


업무 지시가 내려왔다. 정해진 기한 대신 '준비되는 대로'라는 말이 같이 내려왔다. 이런 경우 몇몇 팀원들은 기한이 좀 오래 걸리더라도 '완벽한'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한다. 사실 이건 회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대학에서 학생들 논문 지도를 할 때도 자주 보아온 패턴이다. 마감 직전까지 붙잡고 있다가 촉박하게 제출 전에 좀 빨리 봐줄 수 없겠냐고 묻는 학생들. 혹은 피드백받을 시간도 없이 제출해 버리는 학생들. 


개판인 초안을 내놓고 신랄한 피드백을 받는 것보다야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고 완성도가 있는 초안을 내놓는 건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초안'이다. 그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누구도 딴지 걸 수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보고서 자체가 그 사람만 아는 지식에 관한 거라면 모를까, 보통 회사의 보고서는 당연히 초안에 피드백이 딸려 온다. 


그렇기에 나는 보통 팀원들에게 처음부터 완벽하려는 시도를 버리고 일단 초안을 빨리 내놓는 것에 중심을 두라고 한다. 그럴 경우 장점이 여러 개 있는데, 먼저 초안이 대차게 까이더라도 다시 고칠 시간이 충분하다. 


둘째로 만약 당신이 시간을 오래 걸려 초안을 내놓았다면 당신의 상사는 그게 당신의 '최선'이라고 믿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어설프게 밑천을 드러내느니 초안을 빨리 완성해 이게 '초안'이라는 걸 강조하고 피드백을 요청함으로써 기회를 얻는 게 낫다. 상대방의 업무 방식을 배울 기회 (특히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 당신이 잘 보야야 하는 직책의 상사라면)와 당신의 융통성과 성장 가능성을 내보일 기회 말이다. 


3. 꼼수 부리지 말고 부딪히자. 


예전에 대학에서 일할 때 어떤 수업은 강당에서 150명 이상의 학생들을 앞에 두고 진행했었다. 내가 학생일 때도 그랬지만, 그럴 때 사람들은 흔히 앞에 서있는 사람이 강당 안의 모든 사람들을 볼 수 없을 거라고 착각하는데, 앞에 서보면 다 보인다. 저 뒷자리에서 랩탑 켜놓고 딴짓하는 사람, 옆자리 사람과 폰 화면을 보여주며 속닥거리는 사람, 앞을 보고는 있지만 멍 때리는 사람 등등. 


일을 할 때도 비슷하다. 팀원들 사이에서야 누가 어떤 업무를 하고 있는지 모를 수 있겠지만, 업무를 지시하는 입장에서는 대충 개인의 업무량과 내용들을 다 파악하고 있다. 누가 어떤 일을 맡고 있고, 우선순위가 어떻게 되며, 그 일의 마감이 언제까지 인지, 다른 세세한 일들이 있을 걸 감안하면 대충 그 사람이 어떤 일을 하는데 얼마 정도의 시간이 필요한 건지, 등등. 


그런데도 어떤 업무 진행 속도가 느리다면, 그 사람에게 그 일의 우선순위를 뛰어넘을 다른 일이 있다거나, 아니면 업무를 방해하는 어떤 요소가 있다는 소리인데, 그것 때문에 업무의 마감일까지 어길 정도라면 그건 업무 지시자에게 보고해야 하는 일이다. 그런 보고도 없이 마감 때가 되어서야 다른 '바쁜 일'이 있었다는 건 솔직히 핑계에 가깝다. 




생각해 보니 박사과정을 마친 뒤 첫 직장을 제외하면, 그 이후부터는 줄곧 사람을 'manage' 혹은 'supervise'하는 입장에 있어왔다. 


대학 때 담당 학생들이야 어차피 졸업해 나가면 끝이고, 공무원 때는 업무 효율보다는 사람 관리 자체에 중점을 두는 분위기가 있어서, 가끔 속이 뒤집어져도 참고 넘어갔는데, 기업에 들어오고 나니 확실히 사람보다 업무 중심이라는 게 확 느껴진다. 사람 잘려 나가는 것도 그렇고, 회사의 인내심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도 그렇고.. 


그러니 요령껏 요령껏 일해서 살아남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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