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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Sep 10. 2023

관계는 저절로 맺어지지 않는다

딩동

아이들이 잔뜩 기대하는 표정으로 문밖에 서있다. 노년의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가 아이들을 발견하고는 환하게 웃는다. 문 밖에서의 소란 때문에 뒤따라 나온 노년의 여자도 아이들을 알아보고 두 팔을 벌리며 환영한다. 

아이들은 노년의 부부 품에 안기고 신나 하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차에서 이것저것 꺼내 들고 뒤따라 오는 중장년의 부부가 노년의 부부에게 인사하고, 네 사람 모두 환하게 웃으며 집안으로 들어간다. 


어디에서 본듯한 장면. 

조부모댁을 방문하러 간 가족들의 행복한 모습.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현실의 모습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럴듯하게 만들어진 상업적 이미지.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나도 이런 모습을 아주 당연하게 상상했다. 조부모와 내 아이들의 관계는 저럴 거라고. 정작 나는 그런 경험도 기억도 없지만, 막연하게 내 아이들은 다르지 않을까, 혹은 아마 그런 관계를 기본값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이번 여름. 

스페인에서 우리는 한 달을 보내는 동안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아이들이 생각 외로 조부모를 보는 일에 대해 심드렁해했다. 심지어 둘째 아이는 왜 우리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같이 지내야 하는 거냐며 투덜대기까지 했다. 


스페인 집에 도착하고 일주일. 

시부모님이 말씀하셨다. 너희 아이들은 우리를 투명인간 취급한다고. 


그분들은 섭섭해서 하신 말씀이지만, 뭐라고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일 년 중 여름에 한번 보는 사이. 그 외에는 가끔 메신저로 안부를 묻는 게 전부인 사이. 

여름 한 달 정도를 스페인에서 보내지만, 왕복 여정과 휴가를 제외하면 보통 2-3주 정도를 한 집에서 보내게 된다. 그렇다고 시부모님이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가거나 집에서 같이 놀아주는 것도 아니다. 장난감 같은 걸 사주는 것도 아니고, 도리어 아이들이 거실에서 놀고 있으면 어지르지 말라고 놀이방으로 들어가라고 보내신다. 


휴식 시간을 방해한다고 조용히 하라고 야단치고, 아이들이 정리를 안 했다고 혼내시고, 영어를 쓰는 게 예의 없다며 스페인어만 쓰라고 나무라시고, 잔소리하시고. 


솔직히 어른인 나도 저절로 그분들 눈치를 보게 되는데 아이들은 오죽하랴. 


당연히 아이들은 조부모와만 함께 있게 되는 상황을 반기지 않는다. 시부모님 역시 우리 없이 아이들과 남아 있는 상황을 어려워하신다. 남편과 내가 스페인에 갔다고 마음 놓고 둘이서만 외출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데면데면한 사이가 이어진다. 


시부모님은 아이들 더러 이런저런 얘기를 해보라고 하시지만, 아이들이 한참 빠져 있는 땅 파서 블록 쌓는 게임이 뭔지도 모르시고 관심도 사실 없으시다. 그러니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편하게 영어로 게임 얘기 같은 걸 하며 떠들고, 그걸 보고 시부모님은 아이들에게 스페인어로 말하라고 나무라시니 아이들은 입을 닫고. 그렇게 아이들이 조용해지면 시부모님은 아이들이 자신들과 대화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며 오해하시고. 


휴우. 

옆에서 보고 있자면 그냥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솔직히 기대하는 거야 누군들 못하겠는가. 


시부모님은 아마 잘 길들여진 앵무새 같은 손자, 손녀를 기대하셨을 거다. 부르면 다가와 스페인어로 시부모님이 궁금해하는 학교 생활이나 그런 것에 대해 싹싹하게 대답하며 대화를 이어가는 그런 아이들을. 그분들이 쉴 수 있게 알아서 조용히 사라졌다가, 먼저 다가와 뭐 도울 게 있는지 묻는 그런 예의 바른 아이들. 


아이들 역시 매일 잔소리하는 부모님과 달리 자신들을 무조건적으로 받아주는 조부모님을 원할 거다. 누군가의 조부모처럼 일하는 부모를 대신해 자신들과 놀러 가 줄 수 있는 조부모, 단 음식 양을 조절하는 부모 대신 케이크를 구워주거나 아이스크림을 사주는 조부모. 자신들이 잘못했을 때 부모님께 야단맞을 걸 막아줄 수 있는 또 하나의 내편. 


사람 사이의 모든 관계에는 이 기대치가 존재한다. 가족의 관계가 다른 건, 서로의 기대치가 맞지 않았을 때 관계의 절단이 가능한 친구 혹인 애인 사이와 달리 가족은 그 고리를 끊기 힘들기 때문. 


그래서 부모와 자식으로 만난 우리는 매일 치열하게 다투면서도 어떻게든 협의점을 찾으려고 애쓴다. 만약 조부모 혹은 다른 친척들과도 이렇게 매일 마주쳐야 하는 상황이 이어진다면 우리는 그들과도 어떻게든 공존하려고, 관계의 협의점을 찾으려고 애쓸 거다. 


그런데 일 년에 고작 몇 번 보지도 못하는 가족 관계라면? 

솔직히 남보다 더 못하다. 남이야 한번 보고 끝나면 되니 견디든 엎든 하겠지만, 가족은 어떻게든 유지가 전제되는 관계. 그 과정에서 서로 협의점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안 한다면 거기서 무슨 가족 간의 애정이나 돈독한 관계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의미로 시부모님에게는,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으시면 잔소리를 줄이시고 가까워지려는 노력을 해주세요', 아이들에게는, '너희 말을 다 들어주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원하면 너희가 먼저 다가가서 친해지려는 노력을 해보렴' 하고 말했지만... 


시부모님은 우리의 답이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킬게요'가 아니란 것에 못마땅해하셨고, 아이들은 할머니 할아버지는 우리한테 잔소리만 하시는데 왜 우리만 노력해야 하는 거냐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 

어릴 때는 주위 어른들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싫었고, 커서 부모가 되고 나니 애들이 도대체 왜 저러나 싶어 답답하다가도 내가 부모 노릇을 못해서 그러나 싶어 자책감 들어 돌겠는데.. 이제는 양쪽에서 몰아친다. 


두 쪽 다 말만 제대로 통한다면 말해주고 싶다. 


관계는 양방이 노력할 때 비로소 맺어지고 유지되는 거라고. 그러니 노력하기 싫으면 그 결과물도 그냥 받아들이라고.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한쪽은 아직도 우리를 '어른이 충고하면 네,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어린아이로 보고, 다른 한쪽은 우리를 잔소리만 해대는 꼰대로 생각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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