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이 지난 지 알마 되지 않아 예약한 미용실에 갔다.
샴푸를 하고 자리에 앉아 디자이너가 본격적으로 머리 손질을 시작하면서 우린 어느 나라 미용실을 가도 그렇듯 대화를 시작했는데, 부활절 방학 (Easter Holiday)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당연히 화제는 그때 뭘 했냐, 잘 보냈느냐로 넘어갔다.
부활절 방학을 맞아 친구 두 가족과 큰 별장을 빌려 스페인 북부로 휴가를 다녀온 나는 에피소드가 넘쳐났기에 내 이야기를 하기 전에 가볍게 질문부터 했다.
"Where did you go?"
"We just stayed at home. It's really expensive to go anywhere, you know."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충 맞장구를 쳐주면서 머릿속에 있던 스페인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지우고, 화제를 바꿨다.
영국 사람들은 우스개 소리로 프랑스 사람들을 보고 휴가를 가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라며, 툭하면 휴가를 간다고 사라지면 도대체 일은 언제 하는 거냐고 투덜대면서도 부러워한다. 특히 여름 8월 경에는 대다수 남유럽에 위치한 회사의 담당자들이 죄다 휴가라고 사라져 일처리가 아예 안되기도 한다.
반면 미국에 위치한 파트너들은 영국에서 일하는 우릴 보고 우스개 소리로 그런 말을 한다. 너희는 휴가도, 휴일도 너무 많다고.
실제로 프랑스의 총 휴가(paid holidays, holiday entitlement) 일수는 30일인데 심지어 여기에 공휴일이 끼어있는 것도 아니란다. 그에 비해 영국은 28일을 보장해야 하는데, 여기에 공휴일이 포함할지 아닌지는 회사 방침에 맡긴다고 되어 있다. 이제껏 일한 회사들은 대부분 25일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모두 공휴일이 포함되지 않은 날짜고, 대신 연차가 쌓일수록 1일씩 최대 30일 혹은 35일까지 늘어나는 방식이었다.
참고로 국가별 공휴일은 프랑스가 11-13일, 영국은 8-10일, 스페인은 12-14일, 미국은 6-11일이다. 이 기간이 딱 하나로 정해지지 않은 까닭은 모두 지역별 휴일이 따로 있어서 그렇다. 특히 스페인은 각 Town마다 휴일도 있어서 이것보다 더 많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한 김에 한국을 찾아보니 법적으로 1년 이상 근무한 근무자에게는 유급휴가 15일을 보장해야 한다고 나와있다. 이걸 보고 영국의 시스템에 익숙한 나는 그럼 그전까지는 휴가도 가지 말란 소린가, 그럼 아이들 방학 기간에는 어쩌고? 하는 온갖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어쩐지 건드리면 벌레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아 일단 묻어두자. (Open a can of worms)
다시 휴가 이야기로 돌아와서...
영국에서 일하는 입장에서는 솔직히 스페인, 프랑스나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하면 영국의 휴가는 별거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적어로 영국의 중산층은 프랑스 사람들 만큼이나 휴가에 집착한다.
주위를 보면, 아이들이 없거나 장성한 경우에는 학교 방학을 피해서 주로 5- 6월, 9-10월에 휴가를 가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있는 경우에는 half yerm (학기 중 방학, 한 학기가 대충 12주인데 그 중간이 되는 6-7주쯤에 일주일간 쉬는 방학을 말한다. 사립학교의 경우에는 2주일 간 쉬기도 한다) 혹은 school joliday (학기가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있는 방학. 영국의 학기는 9월에 시작하기 때문에 크리스마스에서 새해까지 대략 2주, 4월에 있는 부활절을 전후로 2주, 그리고 새 학년이 시작되는 9월까지 7월 말부터 대략 5-6주간 쉰다) 때 맞춰 간다.
방학은 성수기라 휴가 비용이 워낙 높아지다 보니, 예전에는 부모가 학기 중에 아이들을 데리고 휴가를 가는 경우도 많았는데, 만약 학교에 미리 허가받지 않고 아이들을 보내지 않는 경우 부모는 최대 160파운드 (대략 28만 원)에 달하는 벌금을 내야 한다 (https://www.gov.uk/school-attendance-absence/legal-action-to-enforce-school-attendance). 그런데 솔직히 이 방침은 굳이 휴가 때문이라기보다 저소득 가정에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방치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가족들은 휴가 비용을 아끼기 위해 아이가 아프다는 핑계까지 대가며 휴가를 가기도 하지만, 대부분 중산층의 가정에서는 그냥 방학 기간에 맞춰 휴가를 가는 편이다.
이때 기간이 짧은 학기 중 방학에는 영국 내 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있지만, 학기 간 방학 때는 대다수 외국으로 가는 걸 선호한다.
왜냐면 영국 물가가 비싸서 (참고로 하룻밤 숙박 비용이 예전에는 그래도 60-80파운드 정도였는데 요즘에는 airxxx라도 100파운드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사실 영국으로 가나 외국으로 가나 쓰는 돈은 비슷하고, 같은 값이라면 이왕이면 더 나은 날씨에 다양한 음식과 문화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4인 가족이 일주일간 휴가를 가는 경우, 휴가 비용은 어떤 휴가를 가느냐에 따라 다른데 가까운 유럽 국가로 간다면 보통 교통비 (비행기값 포함), 숙박비만으로 1-2천 파운드 (백팔십에서 이백육십만 원 정도)는 나간다. 그 외 관광과 식비로 아마 5백 파운드 이상이 나갈 거고...
물론 가정마다 편차야 있겠지만, 최저 비용이란 건 있을 수 있어도 최대 비용은 없다.
친구네 가족의 경우 북부 프랑스로 스키여행을 2주간 다녀왔는데, 스키 리조트에 머물면서 아예 휴가 기간 내내 출장 요리사를 고용해 식사를 해결했다고 했다. 그 이유는 "We didnt want to cook when we were on holiday" (휴가 때 요리하기 싫어서).
영국인들이 즐겨 찾는 여행지는 보통 스페인, 남부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최근에는 크로아티아 같이 날씨가 어느 정도 보장되는 곳일 경우가 많고, 저소득층은 이미 영국인들에게 잘 알려져 있고 물가가 싸다고 소문난 곳으로, 고소득의 중산층 같은 경우는 유명한 관광지나 한적한 휴양지 같은 곳으로 주로 간다.
이런 휴양지도 솔직히 놀러 오는 사람에 따라 티가 나는데, 같은 스페인이라도 베니돔 같은 곳은 싼 술값을 즐기러 온 영국인들로 거기가 맨체스터 유흥가인지 스페인인지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그 외 한적한 바닷가 아파트 같은 곳에는 노부부가, 수영장이 딸린 별장이 있는 지역에는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많다.
이렇게 해외로 가지 않더라도 영국 바닷가나 휴양지로 유명한 곳에 별장이나 카라반을 사서 휴가를 보내는 이들도 꽤 많다.
이들의 특징은 그걸 사서 쓰지 않을 때 렌트해서 여분의 돈을 만들어 보겠다는 목적이 아니라, 정말 쉬고 싶을 때 가서 쉬는 휴양지로 두고 쓴다는 거다.
그 외 중산층 가족 출신 친구들 중에는 부모가 이미 사둔 별장을 물려받아 쓰기도 한다. 아니면 조부모가 손자 손녀들을 데리고 휴가를 가거나.
이렇게 말하니 영국 중산층은 돈이 진짜 많은 것 같은데 사실 별장 (holiday home)이라고 어디 영화에서 나오는 수영장 딸린 근사한 맨션 하우스 같은 게 아니라, 대략 방 2칸 정도 되는 아기자기한 cottage나 바닷가 근처에 이런 용도로 지어진 작은 이층짜리 집 같은 건 저렴한 건 십오만 파운드 정도 (한화로 이천칠백만 원 정도), 카라반 같은 경우에는 십만 파운드 이하로도 살 수 있으니 중산층 (특히 upper middle)이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럼 이들은 왜 이토록 휴가에 진심인 걸까?
일단 내 생각에 가장 큰 영향은 영국의 날씨인 거 같다. 해를 보기 힘들고, 10월 서머타임이 끝나면 빨리 어두워지고... 해가 잘 안 보이고 매일 우중충하고 어두운 하루를 보내면 덩달아 기운이 주욱 빠진다.
괜히 영국인들이 안부 인사를 묻는 질문에 날씨와 연관된 답을 하는 게 아니다. ("I'm good, it's very sunny today" or "I'm ok, but it's miserable outside").
두 번째로는 아마도 이들의 생활 패턴과 연결되는 게 아닐까 싶다.
보통 영국의 중산층은 정해진 시간대에 일을 하고, 그 외의 시간은 아이들과 가족들과 보낸다. 일/집/아이들 방과 후 활동 등의 패턴이 형성되어 있는 거다. 물론 그 외에 취미활동이나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체로 패턴이 일정하고, 밖에서 뭘 따로 하면서 놀 곳이 별로 없다.
그렇지 않겠는가, 오후에 일을 마치고 나면 다른 음식점이나 가게들도 다 문을 닫고 자기 집으로 갈 준비를 하는데. 펍이나 바가 11시나 그 이후까지 오픈하긴 하지만, 다음날 출근하는 성실한 중산층은 주중에 밤 10시가 넘어서까지 술을 마시러 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니 이렇게 야금야금 쌓인 스트레스를 몰아다가 휴가 때 해소하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