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회사나 개 같은 부분이 존재한다.
회사가 크든 작든, 그게 어떤 산업 관련 조직이건 간에.
일의 성격상 다른 회사와의 협력이 많은 편인데, 작년 연말에 거래 담당자들이 대거 물갈이 됐다. 어떤 거래처의 담당자는 뭐라 설명도 없이 "I no longer work in XX (회사명)"이라는 글이 적힌 'Out of Office' 메시지로 퇴사 소식을 알렸고, 어떤 이들은 퇴직 마지막 주에 '이번 주가 마지막입니다'라는 연락을 보내오기도 했으며, 어떤 이들은 그나마 미팅에 참석해 '이번이 제가 참석하는 마지막 미팅입니다'라고 통보하기도 했다.
그나마 친한 이들은 오프라인에서 좀 더 자세한 속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미국에 본사를 두고 있는 회사였는데, 매년 연말을 앞두고 인원 감축 타깃을 유럽 지사에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 회사에서는 자체적으로 그 숫자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Voluntary redundancy (명예퇴직, 자발적 희망퇴직)등의 형식으로 정리해고를 감행한다.
대상이 되는 이들은 보통 나이가 어느 정도 있는 중간 관리자 이상의 사람들. 특히 연차가 있어서, 하는 일에 비해 연봉이 높은 이들. 아니면 부정적 업무 평가로 이미 찍혀 있는 경우.
그 회사에서 15년을 일했다는 50대 중반의 M은 씁쓸하게 웃으며 "나도 그렇게 내 밑의 사람을 많이 내보냈고 이제는 내 차례가 왔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밖에서 이런 일이 있는 동안 내부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크리스마스가 되기도 전에 이미 3건이 넘는 'farewell' 카드에 사인을 했으며 (이것도 그나마 그들과 친한 동료들이 주도했기 때문에 이런 거라도 했던 거지, 대부분의 퇴사 대상자들은 조용히 사라졌다), 연말 휴가를 다녀왔더니 또 퇴사인원수가 늘어있었다. 이것도 내가 알고 있는 수만 이런 거지, 그 외 다른 나라에 있는 지사들까지 생각하면 아마도 수가 더 많을 거다.
데이터와 관련된 업계 자체가 워낙 빠르게 변하다 보니 회사 간 인수 합병도 많은 편이라 그런 것도 있고, 회계연도가 끝나감에 따라 연말 결산 때 좀 더 좋은 성과를 보이기 위해 연례행사처럼 인원 감축을 하는 곳도 있다. 공무원을 할 때나 교직에 있을 때에 비하면 좀 더 빈도수가 높은 게 사실이지만, 처음 겪는 것도 아니라서 딱히 놀랍진 않다. 다만 태풍 경보에 이번 태풍 때는 피해가 적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회사에 몰아치는 정리해고 태풍을 볼 뿐이다.
다만 늘 신경 쓰게 되는 건 그 이후 남겨진 이들의 분위기다.
작년부터 회사는 아주 공격적인 성과급 제도를 실시하기 시작했는데, 그 덕에 매분기마다 분위기가 살벌하다. 겉으로 보기에는 열심히 일하는 이들에게 그만큼의 보상을 실시하겠다는 제도처럼 보이지만, 실상 그 내용은 회사에서 정한 기준을 모든 회사 구성원에게 강요하고, 회사에서 정한 기준에 못 미치는 이들은 미리 싹을 잘라 버리고, 기준보다 훨씬 웃도는 이들에게만 돈을 주겠다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회사가 정한 기준'이라는 거다. 인사과에서 일해보거나, 관리자 입장에 있어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 기준은 그냥 누군가 '열심히 일한다'라고 맞춰지는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야근을 밥 먹듯 하든, 회사일이라면 주말에도 업무폰을 확인하며 일을 처리하든 말든, 그런 건 하등 상관이 없다. 그 정도의 '노력'은 회사 기준 상 당연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아니, 어떤 때는 심지어 그런 정도의 노력을 했음에도 회사가 바라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로 더 낮게 평가가 매겨질 때도 있다.
그리고 회사가 그런 성과급 제도를 실시한다는 말은, '당신의 노력에 보상하겠다'라거나, '열심히 일하는 이들에게 좀 더 균등한 보상이 돌아가도록 하겠다'라는 말이 아니다. 전체적인 임금 인상이나 보너스를 지급하는 대신 몇몇의 소수에게만 본보기로 큰 보상을 주겠다는 소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일관적인 보너스를 주는 것보다 적은 돈을 쓰겠다는 소리다.
그러니 당연히 이 성과급의 혜택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이들은 회사 전체의 구성원을 따져봤을 때 몇 퍼센트도 안된다. 이러면 사람들이 그 보상을 얻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할 거 같지만, 어차피 앉을 수 있는 의자의 수가 정해진 경주에서 많은 이들은 그저 뒤에 서서 상대적 박탈감, 혹은 무력감을 느낀다.
어떤 이들은 말한다. 어차피 노력해도 안될 거 그냥 포기하겠다고. 그동안 내가 열심히 회사를 위해 일했던 시간들이 부정당하는 것 같다고.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굳이 열심히 일해야 하나 회의감이 든다고.
이런 이야기를 팀원들에게 수차례 듣고 있자면,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어진다.
회사가 조직 운영과 이윤 추구를 위해 실시하는 정책에 자신의 가치 판단을 맡기지 말라고.
회사는 가능한 적은 비용을 들여 최대한의 이득과 효율을 창조하려고 한다. 그걸 위해 회사의 경영진은 이런 당근이 몇 개 달린 채찍을 휘둘러 대는 거고.
그 회사에서 일하는 우리는 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한다. 이건 순수한 거래에 해당한다. 그들은 내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들여줘야 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아니고, 우리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고, 언제든 서로에게 냉정해질 수 있는 관계다.
어떤 회사는 내가 제공하는 노동력의 가치를 알아보고 높게 살 수 있고, 어떤 회사는 똥값처리할 수도 있다. 그건 내 노동력의 문제지, 나라는 사람의 가치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왜 여기다가 자신의 자존감, 혹은 존재 이유까지 걸려고 하는가.
그렇다고 이런 성과 제도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라는 소리도 아니다. 이런 제도는 당근에는 인색할지 몰라도 채찍의 역할은 확실히 하니까.
다만 당신이 제공하는 노동력에 대해 꺼릴 것이 없다면 이렇게 몰아치는 태풍에 어느 정도는 초연해질 필요가 있다. 하루의 삼분의 일을 잡아먹는 일이 만족스럽기까지 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무리 태풍 속에 흔들리는 배 위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도 우리에게는 배 밖에서의 삶이 존재하니까. 뱃멀미 때문에 회사 밖에서의 삶이 엉망이 되었다고 회사가 그걸 보상해 줄 것도 아니고.
태풍이 멀쩡한 사람까지 돌게 만들 정도로 배를 몰아치면, 갈아탈 배를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태풍에서 자유로워질 거란 보장은 없지만.
이래저래 심란한 일이 많았던 연말이었고, 아직도 진행 중인 연초다.
오늘 회의에서 어쩌면 또 다른 제도가 도입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아야 했다. 대신 그거까지 실행하면 high performance culture는커녕 회사 전체 팀분위기 개판 날 거라는 경고만 던졌다.
회사에 뭘 딱히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서로 적당히 좋은 관계 유지하면서 일만 하고 싶은데, 왜 이리 쉽지가 않습니까.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