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유학 생활 초반에 런던에 놀러 갔을 때였다.
무작정 걷다가 피곤하면 일반 버스를 타고 돌아다니다가 또 뭔가 보인다 싶으면 내려서 걸었던, 무계획 여행이었는데, 그때 Bank 역 근처를 지나가다가 봤던 사람들의 모습이 유달리 인상에 깊게 남았다.
다소 쌀쌀한 가을 무렵, 정장에 코트를 차려입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회사원들. 영국에 온 지 세 달도 안된 상황이라 여전히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외국인들이 신기하면서도 슬슬 영국의 그늘진 부분도 알아가던 시기였는데, 그때 봤던 런던의 직장인들은 어찌나 멋져 보이던지.
그때부터 막연하게나마 나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다. 코트에 구두를 신고, 사원증을 대충 들고, 다른 동료들과 영어로 멋지게 대화하며 저녁에는 근처 펍에서 술도 마시는, 런던의 직장인!
그로부터 대충 20년이 지났나?
나는 그런 직장인이 되긴 했다.
Bank 역을 포함해 회사들이 득실거리는 City of London, 유리로 뒤덮인 건물 중 하나에 내가 다니는 직장이 있고, 나는 대부분의 런던 직장인처럼 코트에 부츠를 신고,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체 바쁘게 걸어 다닌다.
런던에 지금 살지는 않지만, 예전에는 런던에서 살아본 적도 있고, 직장 생활 때문에 자주 오고 가는 까닭에 이젠 런던에 가도 딱히 감탄하거나 하진 않는다. 도리어 무슨 행사가 있다거나 그러면 교통이 혼잡해질걸 먼저 걱정하는 닳고 닳은 직장인이다.
직장에서도 짬밥이 꽤 되기 때문에 이십 대의 사회 초년생들은 내게 바로 보고를 하지 않고, 그들에게 나는 좀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팀원들은 대체로 삼십 대 후반부터 오십 대까지 다양한 편인데, 삼십 대의 팀원은 아직 패기가 넘쳐서 어떻게든 성과를 올리려고 하고, 오십 대 이상의 팀원들은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도리어 심드렁해한다.
그리고 여기까지 아득바득 기어올라온 40대의 나는 언제나 피곤하다.
어디서 갑자기 형태만 대충 잡힌 딜(deal)을 물어와서 나더러 정교하게 조각해 놓으라고 내던지는 호방한 대표님도 그렇고, 내가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와서 자신이 생각하는 완성품을 그대로 만들어내길 원하는 깐깐한 상사님도 피곤하다.
프로젝트를 던져놨더니 의견 조율은커녕 서로 눈치만 보면서 할 일을 미루는 부서 담당자들을 볼 때도, 하라는 건 하지도 않고 성과급이 얼마냐고 묻기만 하는 직원도, 이해를 못 했으면서 질문도 하지 않고 진도도 나가지 않고 그저 깔아뭉개고만 있는 직원도.
사람들의 불만이나 불평을 듣고 조율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 도리어 나는 혼자 그걸 삭혀야 할 때가 많다. 나와 비슷한 직급의 친한 동료라고 해도 혹시나 업무상 해당 직원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가지게 될까 봐 진짜 어떤 문제가 있는 게 아닌 이상 그런 속 얘기는 하지 않고, 당연히 내 상사에게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섣불리 푸념이랍시고 얘기했다가 진짜 그 사람의 인사고과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신경 쓰면 뭐 하나. 실드를 쳐놨는데 지 손으로 그걸 부셔놓는 사람도 있는데. 그럴 때면 위아래로 조율하는 것도 참 죽을 맛이다.
인간관계뿐이랴. 팀이 커져서 타임존도 달라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호주부터 미국까지 회의를 하고 일을 마치고 나면 그냥 다 피곤하다. 그래도 쉴 수는 없지. 아이들이 그러면 엄마는 일만 한다고 뭐라고 할 테니까.
새벽부터 출장 갔다가 저녁 늦게 (또 지연된)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몸이 반쯤 녹을 것처럼 피곤해서 하는 푸념입니다.
영국에서는 워라밸이 잘 지켜지지 않느냐고 물으신다면 모르겠습니다. 그냥 중년의 직장인은 다 피곤한 거 아닐까요. 그래도 꾸역꾸역 기차에, 전철에, 버스에 몸을 구겨 넣고 다니는 우리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