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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Mar 18. 2020

이 상황에도 너는 없구나

보스의 부재

오늘 아침 공문이 내려왔다. 어제저녁 발표된 보리스 수상의 코로나 바이러스 대책 발표에 따라서 영국 모든 정부기관 내 가능한 업무들은 다 재택근무로 전환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내용에 따라 내 담당부서에 연락을 돌리고 비상회의가 몇 개씩 잡혔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다들 신경이 좀 곤두서 있었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Branch head들이 모여 대책 회의를 하다가 어느 순간 우린 다 싸한 침묵을 유지했는데.. 그건 바로 우리 바로 위 수장의 부재 때문이었다.


나의 보스이자 우리들의 수장인 P로 말할 것 같으면... 일단, "He's a good guy"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늘 "but"이란 말을 붙이게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분명히 업무능력도 뛰어나고 사회성도 좋은 사람인데, 일단 잘 없다. 있으면 정말 요긴한데 늘 잘 사라지는 머리끈처럼.


 지금 일하는 정부기관의 구조상 오피스가 지역 3군데로 나뉘어 있는데, 보통 일정 직급 이상이 되면 한 달에 최소 2-3번은 회의나 팀원 관리 등의 이유로 다른 오피스로 출장을 다닌다. 그런데 내 보스는 메뚜기 마냥 일주일에 2-3번씩 그 사이를 왔다 갔다 거린다. 뭐 딱히 일이 있어라기 보다 A office 근처에 자기 숙소가 있고 B office 근처에 자기 파트너 숙소가 있어서 장거리 연애에, "I'd like to be available for everyone"이란 업무적 요소를 접합시켜 메뚜기 생활을 하는 건데... 그런 출장 시간이 다 근무 시간에 포함되고, 공무원 규칙상 4주를 간격으로 일정 시간 이상의 근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잦은 출장으로 쌓은 마일리지(!)를 대략 3-4주에 한번 꼴로 휴가를 보내며 써버리는 거다. 그러다 보니 이 보스는 여행이 잦다. 한 달에 한번 꼴로 스페인이니 프랑스 스키여행이니 어디니 일주일 정도 잘도 사라진다. 거기다 기차를 타는 것보다 본인의 멋진 차를 타고 다니는 걸 즐기기 때문에 근무 시간으로 취급되는 출장 시간은 그냥 도로에 갖다 버리는 시간이다. 그래서 막상 휴가에서 돌아오면 그 사람은 늘 쌓인 메일들에 대해 불평한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오피스에 1-2일 정도밖에 없고, 휴가가 잦으니 그 사람의 일정은 늘 회의들로 꽉 차있다. 그렇게 그 사람은 일을 할 때는 밀린 메일들과 쌓인 회의 일정으로 고생하고, 또 잦은 출장으로 쌓인 마일리지와 일 적 스트레스를 휴가를 써서 사라지면서 푼다.


그리고 그 사람의 이런 업무 형태 중간에 바로 내가 있고 우리가 있다.


일단 팀원들은 "He's never been around"라고 평가한다. 그 말을 어쩌다 듣게 된 보스가 억울하다고 말했다. 그런 이미지를 주지 않기 위해 이렇게 매주 메뚜기처럼 뛰어다니고 있는데 몰라준다고. 아니, 가면 뭐해, 하루 종일 회의에 붙잡혀서 네 코빼기도 볼 수 없는데;; 심지어 전체 부서 행사에서도 가끔 처리해야 할 이메일이 쌓였다고 사라지면서;;


그리고 그 사람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 우리는 환장한다. 아주 만날 수 없거나, 아예 메일을 안 읽거나 하니까;; 거기다 이번처럼 비상 상황이 다가올 때 사라지면 정말 답답하다. 전에 구조조정으로 부서 내 분위기가 아주 개판일 때도 일주일 이상 휴가 가버리는 바람에 그 실드를 치느라 장난 아니었는데... 돌아가는 코로나바이러스 확산 추세를 보면 이렇게 될 줄 뻔히 알면서 스페인에서 휴가 돌아온 지 2주 만에 저 어디 남쪽 섬으로 10일간의 휴가를 가버리다니... 갔다가 발이 묶일 수도 있는데 진짜 갈 거냐, 라는 말에 아주 해맑게 웃으며, "if they take us, yes!"라고 말하는데 진짜;; 거기가 폐쇄라도 되면 어쩌냐 하니, "Then we will stay, I don't mind"하는데... 진짜 콱 그 얄미운 얼굴을 어찌할 수도 없고.. 천진한 웃음을 뭐라 할 수도 없고...


물론 그러다가 딱 지 휴가 가기 전에, "Sorry, I ran out of time. Could you.." 하고 장문의 (내가 처리해야 했지만 시간이 없어 못하니 너희가 나눠서 처리하렴)하고 떠넘긴 일들의 목록을 보면서는 절로 욕이 나왔지만 -_-


그리고 보스가 사라지고 딱 하루 만에 떨어진 비상사태. 그리고 그 빈자리를 보면서 나오는 소리들을 삼키고 있는 우리들.


남편은 그럼 보스의 보스에게 말하면 안 되냐고 한다. 그 제안에 나도 침묵하게 되는 걸 보니 나도 공무원의 위계질서에 이미 길들여진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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