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만 전념할 수 없는 맞벌이 워킹맘
코로나바이러스로 또 발이 묶인다
위쪽에서 '웬만하면 여행이나 외출을 자제하고 가능한 모든 업무는 재택근무로 돌릴 것'이란 공문이 내려온 지 하루 만에 정부기관 내 상황이 아주 바쁘게 움직였다. 사람들이 재택근무를 위해 아침에 사무실에 들려 모니터를 가지고 가는 게 확인되면서 Security에서 급히 대책을 논의하느라 '무단으로 비품/물품 외부 반출 금지' 메일이 몇 개가 날아왔고, 아침에 전체 부서를 상대로 한 임시회의에서 사람들은 육아 등의 이유로 재택근무를 제대로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최소 3달간 자가 격리하도록 지시를 받은 70대 이상의 고령 가족이 있는 경우, 그들을 돌봐야 할 의무로 근무 시간에 영향을 받게 되면 어쩌냐, 자가 격리 기간에 들어가게 되면 그에 따른 근무시간과 수당은 어떻게 되느냐 등등... 다양한 질문들이 나왔고, 그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기 위해 각 부서들이 긴급회의에 돌입했다.
우리 역시 여러 주제를 두고 긴급회의 릴레이가 시작되었는데... 오늘의 주제는 인력이었다. 지금 있는 인력 중 위험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혹은 care duty로 인해 근무에 지장 받을만한 사람들이 있는지, 그럴 경우 근무량을 어떻게 분포시켜야 하는지, 그리고 새로 들어오는 new starter 같은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등...
오늘까지만 해도 영국은 아직 휴교령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학교도 유치원도 일단 정상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 덕에 풀타임 맞벌이인 남편과 나는 아직 일적으로는 영향을 받지 않고 있었지만, 오늘 영국에도 휴교령이 내렸다. 그리고 바로 이번 주 금요일부터 문을 닫는다고 한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주위가 깜깜 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위에 가족도 아무도 없어서 휴교령이 내리면 남편과 나 둘이 알아서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하는데 당장 어떻게 하나 하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그런데 막상 회의가 시작되고, 이런 상황들에 의해 영향을 크게 받을 인력이 몇이냐, 하는 것에 대한 답들이 각 Branch들마다 나오는데 생각보다 인원수가 적은 거다. 분명 나처럼 어린아이들이 있는 사람 수가 꽤 되는 걸로 알고 있음에도... 당장 CH만 해도 내 아이들보다 조금 어린애들이 셋인데! 그런데 CH조차 자신을 그 그룹에서 제외시키는 거다. 그래서 '왜?'하고 물으니, 돌아오는 답은.... 아내가 있기 때문에.
그러고 나서 다시 명단을 확인하니 휴교령이 내렸을 때 근무량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게 될 그룹의 사람들 모두 여자들이다. 물론 나를 포함해서. 하. 좀 허탈하면서 씁쓸하고 뭐 그런 갖가지 기분이 뒤섞였다.
분명 비슷한 연령의 아이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인데, 남자들은 대다수 재택근무에도, 휴교령에도 '영향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왜냐면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일할 동안 아이를 돌봐줄 아내가 있기 때문에. 조직의 입장에서 보면 다행인데, 개인의, 여자의 입장에서 보니 참 씁쓸하다. 육아를 온전히 감당하며 어떻게든 남자가 집안에서 일할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안 그래도 제약된 공간에서 더 제약된 활동을 해야 할 그 남자들의 아내들이 감당해야 할 앞으로의 시간들이 상상이 되어서 괜히 내가 미안해졌고, 나 역시 아마도 자유롭지 못할 거라는 사실에, 그와 동시에 '아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업무를 유지할 내 남자동료와 비교했을 때 혹시라도 성과상 불이익이 나중에 돌아올까 봐 걱정하는 나 스스로도 좀 서글프고...
이런 경험이 처음은 아니다. 예전에 대학에 있었을 때에도 똑같이 경험했다. 내게 4-6시의 강의 시간표가 주어졌을 때, 출퇴근 시간이 왕복 2시간을 훌쩍 넘긴다는 사실과 출장이 잦은 남편의 직장, 6시에 문을 닫는 유치원, 그 상황을 도와줄 가족이나 친지가 없다는 사실 등등으로 한 달이 넘게 대학을 상대로 근무조건, 계약서, 노동법까지 들어가며 온갖 투쟁을 벌이고 있었을 때, 내 아이들과 비슷한 나이 또래의 아이 넷을 가진 나와 입사동기인 남자 교수는 저녁 강의는 물론 주말 강의까지 맡겠다며 앞장섰다. 그 남자는 Head of School이 지시하는 거라면 금요일 저녁에 두바이에 갔다가 일요일에 돌아와서 월요일에 있는 강의를 진행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그 길들 끝에 대학 내 구조조정이 일어난 뒤 바로 Academic manager 자리를 꿰찼다. 그리고 나는 그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아주 복잡 미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나는 꽤 ambitious 한 인간이다. 꽤 경쟁적이고 무시받거나 차별받는 것에 예민하며,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늘 조금은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는 편인데... 이 상황에서 나는 '야, 나도 달릴 거야'하고 낄 엄두조차 못 냈다. 내가 늦은 시간의 근무를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사실 대학에 있었을 때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 밤늦게, 혹은 주말에 짬을 내서 일한 적이 훨씬 많다), 당장 닥친 현실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 남자 동료에게 있었던 아내 같은, 내게는 내 결정으로 인해 닥쳐올 여파를 받아줄 - 아이들을 언제든 돌봐줄 - 사람이 없었다. 남편도 풀타임으로 일하고 출장이 잦았기 때문에, 가능한 시간적으로 융통성이 있으면서 내 커리어를 쌓는데도 문제가 없고 맞벌이를 해도 가족생활이 유지될 직종으로 선택한 게 다시 대학으로 돌아가는 거였는데... 여기서 내 시간적 융통성이 없어지면 우리 가족의 균형은 그대로 깨지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차마 '나도 달릴래' 할 수 없었고, 도리어 내 선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걸 택했다.
그리고 지금. 데자뷔 같은 걸 환경만 바뀐 체 보는 기분이다. 다행이라면 남편과 나 둘 다 같은 상황이니 어찌어찌 조절을 하면 아주 길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렇게 내가 조직에 보장하게 될 (그리고 보장하기 위해 갈아 넣게 될 저녁 근무의 가능성을 포함해서) 최대 7-80%의 capacity (물론 availability 쪽은 어찌할 수 없이 내려앉겠지만...). 반면, 나와 비슷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누군가의 보조 덕에 availability, capacity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일할 사람들. 그리고 그런 것에 아예 영향을 받지 않을, 미혼이거나 아이가 없는 사람들.
그런 경쟁의 길에서 여전히 모래주머니 몇 개씩 차고 달리는 기분이다. 거기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모래 보따리도 짊어지고 달리는 기분이다. 그래도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척, 어떻게든 속도를 맞추려고, 뒤처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면서...
결론: 육아가 필요한 나이 때의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면서도 일에만 전념할 수 있다면 필시 누군가는 그걸 당신을 대신해서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감사를! 그리고 모래주머니 몇 개 메고 덩달아 뛰고 있는 분들은... 어쩌겠나요, 멈추고 싶지 않다면 달려야겠죠. 힘내자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