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토리 Apr 17. 2020

영국 공무원이라는 의미

이방인인 듯 이방인 아닌 이방인 같은 나

내 직업란에 나와있다시피 나는 영국 중앙정부 기관 소속의 공무원 (Civil servant)이다. 어떤 조직인지 밝히지 않는 건 영국이 그런 건지, 아님 내가 속한 조직이 유달리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보안에 대한 교육, 인식이 철저해서 소셜미디어에 조직의 이름이 들어가는 글을 함부로 올릴 수 없기 때문이고, 큰 규모에도 불구하고 조직 내 유색 인종 외국인의 숫자가 현저히 적기 때문이고, 그중에서도 일정 직급 이상에 있는 유색인종이 아주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내 업무는 다양하지만 주로 정보를 다루고, 특히 다른 정부조직 기관들과 꽤 많이 얽혀 있어서 민감하기도 하다. 정책과 관련된 업무도 하고,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바이러스로 나라가 긴급상황에 처한 때는 국무조정실을 보좌하는 일에 많이 연관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이유로 Key worker로 분류되기도 한다. 


처음 계약서를 받았을 때는 '여왕 소속'이라는 문장을 발견하고 그 생소함에 남편과 '와, 우리 영국 사람 다 된 거네'하며 농담을 하기도 했는데.. 정부기관인 만큼 조직은 당연히 영국의 국익, 안전, 보안, 영국 사회의 발전 등등을 최고 가치로 두고 굴러간다. 우리는 public good를 위해 일을 하고, 그에 해가 되거나 reputational damage를 가지고 올 수 있는 모든 일들을 지양해야 한다. 그 안의 한 톱니바퀴를 담당하고 있는 나는 당연히 이 조직의 안녕을 위해 일을 하고, 다른 중앙 정부 기관들과도 수시로 협업해서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톱니바퀴를 굴릴 수 있는가에 대해 늘 고심하고 그걸 위해 행동한다. 


그런데 나는 영국인이 아니다. 영국 사람과 결혼하지도 않았고, 영국인 국적을 취득할 계획도 없다. 나는 영국 사회의 중심 조직에서도 무난히 섞여 들어갈 만큼 그들의 습성과 문화에 익숙하지만, 그렇다고 나 자신이 그들 중 한 명이라는 착각은 절대 하지 않을 만큼 그 차이를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적당히 사교적이긴 하지만, 내가 그들에게 여전히 이방인으로 보인다는 사실과 그 사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나를 대할 때 주춤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게 따지자면... 영국과 나, 우리는 사실 금전관계로 묶인 서로에게 적당한 사업 파트너 정도의 사이랄까.. 나는 그들에게 적당할 만큼의 노동력을 제공해주고, 그들은 그에 대한 대가로 내게 적당한 돈과 이 땅에 머물 권리 정도를 지불한다. 뭐 서로 알고 지내온 세월이 긴 만큼 서로 좀 무뎌진 면도 있긴 하겠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여러 단계의 보안 검사를 거쳐야 했는데, 웬만한 영국인들보다 빠른 시기에 답을 받은 걸 보면, 나란 사람은 아마 위험도가 낮은 좀 믿을 만한 외국인으로 등록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고, 늘 언젠가 떠날 날을 위해 박스를 창고에 모아두던 나란 인간은, 그 박스가 들어있는 창고가 속한 집을 이제 소유하고 있고 여기서 두 아이도 출산했다. 


모든 정황으로 봤을 때 사람들이 내게 '정착했구나'하는 말을 하는 게 이해되긴 하는데... 이상한 건 그 '정착했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거다. 최근처럼 국가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나는 한국인이지만 영국 정부를 위해, 영국 사회를 위해 아주 열심히 일하고 있긴 하지만, 내가 만약 영국 밖에 나갔다가 고립된다면 이 나라는 나를 영국에 다시 데려오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진 않을 거다 (혹시 모르지, 여기서 더 올라간다면 보안을 위해서라도 나를 데리고 들어올지;;;). 그리고 직장을 벗어나면 나는 영국인도 한국인도 아닌 그냥 나로 돌아온다. 무슨 일이 생기면 한국 뉴스도 종종 챙겨보긴 하지만, 그게 아니면 한국 동향은 잘 모르고 한국 방송을 따로 챙겨 보지도 않는다. 매일 습관처럼 BBC 10시 뉴스, 시간이 가능하면 Chanel 4 7시 뉴스를 보긴 하지만, 그렇다고 영국 방송을 즐겨 보지도 않는다 (그냥 뭘 잘 안 본다). 그래도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국제 행사가 있으면 한국이나 남편의 나라를 응원한다. 그리고 브렉시트 같은 상황이나 영국 중심적인 사고들을 마주 대할 때는 아주 분노하고 정 떨어져 하기도 한다;; 


이렇게 영국 문화의 집결지 같은 곳에서 영국 여왕의 소속으로 세금을 월급으로 받아 영국 정부와 사회의 발전이라는 명목을 위해 일하고 있는 나지만, 그게 내 정체성을 보장해주지도, 특별한 소속감을 부여해주지도, 딱히 정착하고 싶다는 욕구를 불러일으키지도 않는다. 그냥 나는 여전히 이 땅에서 오래 산 이방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거다. 


왜 이런 소리를 늘어놓게 되었냐면... 오늘 일을 하다가 지금 속한 조직에 잠재적 위해가 될 수 있게 일을 거지같이 처리한 사람들 몇 때문에 아주 열이 받쳐서, 'They don't understand the risk and potential reputational damange they are causing!'하고 남편에게 불만을 토로하다 문득 생소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적으로 열 받은 건 둘째 치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나 스스로가 새삼 어색해서... 그러다 그런 생각도 들었다. 이다음은 어딜가지? 그리고 여기까지 와서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나는 이방인의 삶에서 벗어나긴 한참 멀었구나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스로를 잘 파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