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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토리 Apr 21. 2020

뛰도록 태어났으면 뛸 수밖에 없다

재능이 있던 말던

요즘은 잠을 잘 자지 못한다. 원래 저녁형 인간이라 아침잠이 많은 편인데도 요즘에는 자꾸 새벽에 깬다. 거기에 낮동안 가끔 신경성 위염도 도지는 걸 보니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재택근무로 전환된 뒤로 육아를 병행하느라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은 줄었는데, 코로나 바이러스로 업무량은 늘었으니 그럴 법하다. 거기다 재택근무라는 이유로 경계 없이 일과 맞닿은 매일을 보내다 보니 예전에 육아 휴직했을 때만큼이나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피폐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남편은 내가 예전 직장들을 다닐 때도 이랬다며 내가 으레 한 번씩 겪는 스트레스 시기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또 새벽에 깨서 당장 월요일 아침에 처리해야 할 일들과 내게 한정된 시간들을 계산하고 있었는데, 생각들이 현실을 넘어 망상의 세계로 뻗기 시작했다. 내가 좀 더 재능이 있었다면 이런 스트레스를 받지 않아도 됐을까, 머리가 좀 더 좋았다면, 아니 차라리 마음을 좀 비우고 여유로웠다면... 그러다가 얼마 전에 쓴 글과 관련해서 내게 Frozen의 엘사 같은 능력이 있다면 그냥 북극이나 남극으로 가서 얼음성 만들어서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녹는 빙하들도 복구하면서... 그러다가 든 아주 잡다한 생각들의 나열이다.


1. 빽 없는 재능이나 능력은 개인에겐 재난일 수도 있겠다

일단 북극이나 남극으로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거기서 얼음성을 짓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자연 다큐멘터리나 연구 등을 목적으로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들을 피해 내 얼음 만들기 능력 따위를 남들에게 보이지 않고 얼음성을 짓기는커녕 혼자 돌아다니는 것조차 할 수 없을 거고,  그러다 내 얼음 능력이 다른 이들에게 알려진 뒤, 나를 보호해줄 빽이 있지 않는 이상 내 안전과 익명성이 보장될 확률은 극히 낮을 것이다. 엘사처럼 한 나라의 여왕이라도 국력이 바탕이 안되었을 때 죽을 뻔했었는데, 하물며 나처럼 한국에서 겨우 중산층에 턱걸이할 거 같은 가정환경에서 자란 인간이 어정쩡하게 능력이 발각되었다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어딘가에 납치되어 시험당하거나 죽어라 노동력만 착취당하며 감시당하다 삶을 마감하게 될지도... 남들과 다른 재능 혹은 능력은 그걸 내가 지킬 힘이 없을 때 공공재로 변해서 착취당하거나 나보다 힘 있는 누군가의 꿈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될 할 확률이 높으니까. 그 대가로 돈을 어느 정도 벌게 된다 하더라도 그게 조건성이라면 어차피 남이 정해놓은 새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말 잘하는 앵무새 같은 삶이 될 수도 있겠지.


2. 능력이 있어도 어차피 빽이 없으면 노력은 필수겠구나

그렇게 착취당하지 않으려면 제 발로 나를 보호해줄 수 있는 돈과 권력이 있는 곳에 들어가 내 능력을 담보로 거래 혹은 협상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북극이나 남극에서 한국 정부의 힘은 약하니 미국이나 러시아쯤 가야 할까, 아니면 영향력이 큰 기업? 그렇다 해도 그런 정부나 기업이 그리 만만 한 건 아니다. 아니 돈과 권력이 있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만만한 이들이 없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착취당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걸 보장받으면서 협상을 하려면 내게도 얼음 능력 외에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들의 목적과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재빠른 상황 판단력이라든지, 내가 하는 일들이 어떤 영향력을 끼칠지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지식, 내 요구조건을 제대로 전달하고 말속에 숨은 의도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의 언어 실력 등등... 그런데 이 정도의 실력을 갖췄으면 사실 이 세상 살아가는 데 있어 얼음 능력 없어도 충분하다;; 그리고 어중간한 증간 단계가 아닌, 얼음 능력 같은 초자연적 능력에 대한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최고 정점에 있는 사람, 조직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이들을 만나는 건 쉽지 않다. 그러니 내가 그들과 은밀하게 접촉해서 협상까지 이뤄내려면 나 역시 그들이 속한 곳 어느 언저리까지 올라가야 한다는 소리다. 그건 마치 현실 게임에서 최종 보스를 찾으라는 미션과도 같아서, 내가 엘사처럼 어느 나라 왕실 출신이라 신분만으로 거기까지 가는 관문 몇 개가 프리패스되거나 돈이 많아 현질 할 만한 상황도 아니라면 , 얼음 능력이 뛰어난 아이큐나 앞서 말한 능력들과 더불어 오는 게 아닌 이상, 열심히 노력해야 뭐든 얻어지는 치열하지만 평범한 삶을 살게 될 거다. 아, 추위에 강하니 난방비는 아낄 수 있겠다.


3. 능력도 돈이나 권력이 있어야 제대로 쓸 수 있겠구나

만약 내가 좀 부강한 나라의 왕실 출신이거나 왕실이 아니더라도 자본주의의 귀족계급에 속할 만큼 돈과 권력이 있는데 얼음 능력까지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꽤나 많을 거다. 나는 집안 소유지 안에서 맘껏 눈사람 따위를 만들며 능력을 시험하고 연습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을 것이고, 자연히 따라오는 교육의 기회, 권력 배움과 인맥 형성의 기회를 통해 내가 하고자 하는 바를 충분히 생각할 시간도, 그걸 이룰 바탕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럼 북극이나 남극에 연구소 하나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내 개인 연구 공간도 만들 수 있겠지.  그럼 나는 연구원이라는 공적 타이틀을 달고 그곳에 살면서 나름의 북극 남극 보존하기 프로젝트를 진행할지도 모른다. 지구 어딘가에서 가뭄이나 홍수, 화재 같은 재해로 시달리는 곳이 있으면 봉사활동이라는 명목으로 가서 지원소 하나 차려놓고 구제활동을 하는 동시에 얼음 능력을 이용해 도울 수도 있을 거고...  그리고 그렇게 쓸 수 있는 재능으로 당연히 더 많은 부를 쌓을 수도 있을 거다. 

그런데 그런 타고난 빽이나 자본 없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자면 가능성이 확 줄어든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북극이나 남극 같은 건 거의 뜬구름 잡는 꿈같은 거고, 얼음 장사를 한다고 쳐도 품질 보장이 되지 않은 걸 팔 수는 없으니 그걸 보장할 사업체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얼음 능력을 보호받으면서 그걸 이용해 이윤을 내려면 개인 소유의 사업체를 가지는 게 최곤데 그러려면 역시 돈이 든다.. 즉, 내 능력으로 이윤을 내려고 하려면 내 돈이 먼저 들고, 그럴만한 돈이 없으면 내 능력을 팔아서 돈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까지 생각을 하고 나니... 얼음 능력이 있든 없든 나는 지금의 상황과 별다를 게 없겠구나 싶다. 이렇게 긴 뻘소리 끝에 결론이 이거라니... 그래, 지금의 나는 주어진 현실에서 최적의 선택을 하고 있는 거니 현실에 충실하자, 뭐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몇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타고난 출신으로 기회가 좌우되는 이 상황은 인간 사회 특성인가 싶어 좀 허망한 생각도 든다. 마치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뛰어야 하는 게 정해져 있고, 누군가는 미리 자동차도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따지자면 개인의 능력만으로 생존이 결정되었던 선사 시대가 더 나았나? 그런데 그때는 쓸만하다고 여겨지는 능력의 종류에 제한이 있었으니, 능력의 다양성을 보장하는 건 지금이 더 나은데, 능력 실현 기회는 꽤 불균등하게 분포된 것 같다) 


씁쓸하긴 해도 내가 얼음 능력을 갖게 되는 상상만큼이나 쓸모없긴 하다 (물론 기회균등히 실현되는 사회를 꿈꾸긴 하고 그런 걸 실현할 수 있는 고아원을 겸비한 교육기관 설립의 꿈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내게 얼음 능력이 있다고 얼음공장을 세우지 못하는 것처럼 역시 그럴만한 돈도 권력도 아직 가지지 못해 여전히 뜀박질만 하고 있다.. 아니면 의지박약을 탓해야 하나). 뛰어야 하는 상황에서 태어났으면 뛰던가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대신 도착점을 내가 뛰는 선 위에 올려둬야 한다. 안 그러면 영원히 도착하지 못할 뫼비우스 띠 안에 갇혀 평생의 노동력만 허비하거나 궤도 일탈하다 자괴감의 늪에 빠질 수도 있으니...



여담. 

슈퍼파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예전에는 누가 넌 무슨 능력을 가지고 싶냐 하고 물으면 투명인간이 되길 원하다가 영국에 나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주 꾸준히 텔레포트 능력을 원했는데, 요즘에는 재생능력, 정화 능력, 뭐 이런 걸 바란다. 이런 것도 나이 들어감의 반영인가.... 혹시라도 이 글을 끝까지 읽으신 분들은 어떤 능력을 원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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