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이 있다. 일처리를 하는데 자꾸 뭔가 틱틱 걸리는 느낌이 들면서, 이메일을 확인하다가, 회의를 하다가 '또 너냐'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쌓일 때, 그러다가 하루의 마지막에는 기어코 이 말을 내뱉게 되는 날. 그런 날을 기념(!) 삼아 예전에 블로그에 영국 대학에서 만나는 진상에 속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공무원 생활도 포함해 소개하는 '너 좀 싫다' 유형들.
1. 말만 잘하는구나.
이들은 출몰지역이 대체적으로 정해져 있다. 뭔가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곳, 큰돈이 걸린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 중요한 인물들이 대거 참가하는 회의 등등. 그리고 이메일에서는 Sender란 보다, cc 란에 더 많이 등장한다. 이렇게 스케일이 좀 있다 싶은 곳에는 수시로 등장하고 회의에서는 말도 아주 이 달의 영업 사원 뺨치게 잘하는데 막상 뭘 맡겨놓으면 진행되는 게 없다. 프로젝트 진행 중에는 아무 반응도 없고 말도 없다가, 좀 높으신 분이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물으면 그때서야 '짧게 요약 좀 해달라'하는 개소리를 늘어놓거나, 한술 더 떠서 마치 자신이 프로젝트 진행을 손수 지휘하기라도 했다는 듯 생색을 내서 다른 사람들의 정신 건강을 해친다. 이런 분류는 사실 직위가 높아질수록 많이 봤는데... 예전 대학에서는 완전 자기 전문 분야인 양, 자기가 프로젝트를 다 진행할 것처럼 Dean앞에서 말해놓고 프로젝트 진행 관련으로 의견을 묻거나 도움을 요청하면 아예 쌩 까거나 아니면 바쁘다는 핑계로 일을 미루다가, 그래도 상대방이 떨어져 나갈 기미가 안 보이면 일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던 교수들이 몇몇 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공무원 조직에서도 비슷하게 회의 요청도 다 씹다가 고위공무원이 포함되는 회의에만 냉큼 나타나서 자기 조언을 미리 구했어야 했니 어쩌니 하는 얌체형 보스 유형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특징은 대부분 늘, 'Short summary'를 요구한다는 건데, 박사과정 할 때 논문을 한 줄로 요약해봐 하고 요구하던 대학 마케팅 담당자만큼이나 어이없다. 그리고 그 짧은 요약을 아주 빠른 시간 내에 요구하기도 하는데 (남들은 몇 달간 투자한 프로젝트에 갑자기 수저를 올리려니 다급한 건 이해하지만), 진짜 그런 요구를 받을 때마다 '야, 못 기다릴 거 같으면 네가 직접 요약하든가. 그동안 이걸로 오고 간 이메일이 몇 통인데...' 하는 말이 목까지 차오른다. 나도 영악한 건지, 이럴 때 내게 큰 위험이 안될 것 같은 사람이 이런 식으로 요구하면 나도 무시하다가 '미안, 내가 너무 많이 바빴네' 하면서 진짜 막판에 아슬아슬하게 보고서를 던져주고, 내가 개길 짬밥이 안되면 욕을 갈아 넣어서라도 보고서를 올리긴 하지만.
2. 그 소리 예전에도 들었는데 이만 넘어가면 안 될까
그런 사람이 있다. 업무상 일을 진행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과거의 온갖 문제들부터 시작해서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까지 계속 반복해서 꺼내는 사람들. 예를 들어 조직이 제대로 된 방향 없이 임기응변식으로 굴러가다가 한번 문제가 터지고 수습단계에 있는 경우, 그 수습을 하러 온 입장에서는 할 일이 많다. 그래서 초반에는 사람들 의견을 듣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수습을 위해 다음 단계를 진행하기 위해 회의를 하는데도 계속해서, 그게 문제였고, 그래서 내가 그렇게 경고를 했는데도 회사가 듣질 않고, 이랬고 저랬고, 등등, 자꾸 대화를 과거의 문제로 끌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말 하고 또 하면 아무리 재밌는 이야기라도 질리는데, 이렇게 자꾸 과거 되감기 기술을 시전 하면 회의 진행도 안되고, 전체적 사기도 떨어진다. 여기에 말도 돌려하거나 늘여서 하는 기술까지 더해지면 진짜 에너지가 급격히 소모되는 기분이다. 내 입장에서는 이미 사전 조사를 다 마쳤기 때문에 그간의 대화를 통해 그 사람이 말하고 있는 문제가 뭔지 이미 파악해서 정리가 된 상태이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해결 방식 A 혹은 B라는 옵션을 꺼내서 그에 대한 의견을 들으러 간 건데, 내가 사전 조사한 것들까지 다 끄집어내서 전에 했던 얘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사람. 상대방이 나보다 직급이 낮거나 비슷하면, "Yes, I understand, we've talked about this before, can we move on to...." 하고 주제를 바꿀 수라도 있지만, 상대방이 나보다 연장자 거나 직급이 높으면, "Yes, I know, let's move on"하고 말을 자르는 게 무례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에 시간 저주에 걸린 듯 아주 초조해진다. 회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 시간 동안 얻고자 했던 결과도 있는데, 시간은 흘러가는데 결론이 나오지 않으니 시간낭비에 내 노동 에너지 낭비고, 그렇게 정해진 시간 동안 결과를 도출해 내지 못하면 또 똑같은 주제의 미팅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마치 모래사막에 빠진 것 마냥 다음에도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생각하면 진짜 의욕이 뚝뚝 떨어진다. 이런 게 반복되면 나중에는 웬만하면 그 사람과 일로 얽히는 것 자체를 피하게 된다.
3. 네가 직접 한 거 아니면 섣불리 수저 올릴 생각하지 말자
직장 생활에서는 솔직히 이렇게 성과 훔치는 도둑질이 실제 물건 훔치는 도둑질보다 더 악질이다. 한국 직장생활 괴담에서도 보고서 이름 바꿔 올린 상사 같은 케이스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영국이라고 이런 분류들이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예전 대학에서 프로젝트를 하나 크게 진행한 적이 있었는데 3개 학부가 포함되었고 외부 업체도 포함된 규모였다. 그 연구 프로젝트 proposal을 쓰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하고 자료 조사를 하고, 그렇게 몇 주에 거쳐 준비했는데, 단체 미팅에서 다른 학부 담당 교수가, "I initiated the coversation.."하고 지가 그 과정을 주도했다는 걸로 말을 해서 분노 게이지가 최고 정점을 찍은 적이 있다. 이런 자리가 진짜 애매하게 사람 엿먹이기 좋은 자리인데, 이런 식으로 중요한 이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말을 먼저 해버리면 거기에 바로, "No, it wasn't him, it was me"하고 반박할 수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내 모습만 우스워지고, 거기다 프로젝트의 성과까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니까. 그래서 이럴 때는 프로젝트의 성과에 초점을 맞춰서 차라리 팀원 전체가 주목받게 하면서, 그걸 주도한 리더들의 역량도 같이 빛나게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데, 이 따위로 누군가가 지 혼자 조명 독차지하겠다고 설치면 진짜 당장 멱살 잡고 싶어 진다;;; 거기에 그 사람이 요리는커녕 테이블에 물 한 잔 놓은 적 없는 인물이라면 와... 진짜....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아 진다.
4. 그렇게 맘에 안 들면 대안을 제시하라고
내가 있는 조직에서 프로젝트 진행할 때 자주 등장하는 말이 있다. 'Blocker' - 그게 사람일 수도 있고, 정책일 수도 있고, 기술 일 수도 있는데, 프로젝트 진행을 가로막는 방해물 같은 거다. 그래서 프로젝트 진행으로 의견 차이가 생기면, 사람들에게서 주로 듣게 되는 말이, "I don't want to be a blocker/ I didn't mean to be a blocker, but..." 이거다. 방해가 되려고 하는 건 아닌데, 그래도... 하고 다른 의견을 피력하는 말. 이런 정도의 의견 차이는 사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걸쳐야 하는 필수 절차에 가깝다. 그런데 간혹 가다 진짜, '그래, 너. 내 방해물'이라고 말해주고 싶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일단 딴지를 많이 건다. 그래, 걸 수 있지. 방식이 잘못되었으면 딴지를 걸어주는 게 맞으니까. 그런데 그뿐이다. 딴지를 걸길래 일단 차를 멈추고, '그럼 어떻게, 어디로 갈까?'하고 묻고 있는데, 질문에 답은 안 하고 계속 왜 내가 멈춰야 하는지에 대해서만 말한다. 그래서 이 차로 A 길로 가는 건 문제가 많다고 했으니 그럼 B길로 가는 건 어때? 하고 되물으면 또 B길이 왜 안되는지 딴지를 건다. 그럼 A 길로 가는 대신 다른 차를 타면 어때? 하고 물으면 그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란다. 그러다 나중에 인내심이 바닥을 쳐서, '그래서 어쩌자고, 우리 그냥 멈추자고?' 하고 물으면 그건 아니란다. '그럼 갈게?'하고 시동을 걸려고 하면 또 막아선다. 그럴 때는 차문을 박차고 뛰어나와 그 사람을 강제로 차 안에 집어넣고 싶어 진다. '야, 네가 운전해, 그럼'
5. 우리 친구 아니잖아? 일만 하면 안 될까?
나는 인간관계의 선을 대략 그어두는 타입이다. 친구들 사이에서도 내가 어디까지 내 사생활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느냐에 따라 대략 구분을 하는 편이고, 일자리에서도 비슷하다. 친구와 동료를 넘나드는 관계가 있고, 일과 관련된 주제에 대해서는 스스럼없이 친하지만 사적 친분까지 가질 사이는 아닌 관계, 동료로서 호감은 있지만 그래도 기본 안부를 제외하면 철저히 일로 연관된 사이, 사적으론 친하지만 일터에서는 거리를 두는 관계, 일이 아라면 부딪히고 싶지 않은 관계 등등. 아마도 이건 내가 그런 성격이기 때문에 껄끄럽게 받아들이는 상황일 수 있는데, 나는 상대방의 신호 따위 무시하고 대놓고 사적 공적 관계를 드나드는 사람이 불편하다. 일과 관련된 얘기를 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반지를 끼고 있는 내 손을 잡으며 결혼했냐고 물었던 남자 동료 교수가 어이없었고 (그 사람 원래 그렇다고 내게 변호하듯 말한 그와 친한 다른 동료 교수에게, 그 사람이 한 번만 더 그러면 성추행으로 고발할 거 같은데? 하고 웃으며 말하긴 했지만), 당신이 뭣같이 강의 시간표를 짠 덕에 내 사생활이 무너진걸 당신도 나도 알고 있는데 '아이들 크리스마스 콘서트는 갔다 왔냐'하고 친한 척 묻는 이의 가증스러움이 싫었고, 내가 바닥 친 모습을 어쩌다 한 번 봤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유약한 인간 취급하며 볼 때마다 눈에 동정을 한가득 담고, 'Are you ok?'하고 묻는 사람도 맘에 들지 않았다. 뭐 이거야 사람마다 다른 거니 어떤 이들은 동료를 친구 삼아 대하는 게 익숙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경계를 내 동의 없이 넘어 들어오는 이들이 불편하고, 그 정도에 따라 피하고 싶을 만큼 싫기도 하다.
물론 이만큼 투정을 늘어놓았으면, 나는 그런 인간에 포함되지 않는지에 대한 고찰도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나는 같이 일하기 싫은 사람이진 않을지, 혹은 깐깐하고 불편한 사람으로 비치진 않을지... 그런데 내가 유체이탈이라도 해서 보지 않는 이상 (혹은 내가 정신줄 놓고 나중에 현타 확실히 오게 하는 깽판을 치지 않는 이상) 내가 어떤 식으로 보일지,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도가 없다. 그런 이유들로 우리는 피드백 시간을 자주 가지고, 또 서로에게 피드백을 원활하게 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그런 시간들을 통해 아직까지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은 적은 없으니 그걸 긍정적이라고 받아 들어야 하나? 아, 가끔 부정과 긍정의 애매한 경계에서 'assertive' 하다는 소릴 듣긴 한다. 영어 뜻을 보자면, having or showing a confident and forceful personality, 비슷한 말로 confident, bold, decisive, 등의 단어가 나오는 것에 비해, 한국말로는 '독단적', '단정적', '고집적'이라고 정의가 나온다;;; 하긴 열 받았을 때 다소 공격적이라는 말도 듣곤 하니, 좀 더 유순한 태도를 연습해야 할 필요가 있는 듯하다. 행여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상처 입히면 안 되니까...
여담 혹은 사소한 질문.
'너 진짜!'하고 이를 악물게 했던 직장생활에서 만난 다른 유형들은 뭐가 있을까요? 아마도 사람 성격 따라 다르지 않나 싶어 궁금하네요. 위에서 말한 유형들이 사실은 별거 아니다, 그런 것일 수도 있잖아요?